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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66) 황려호] 여주 신륵사의 흑마(驪)와 재갈(勒)에 얽힌 사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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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88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11.27 11:18:24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오늘은 이제까지 만났던 겸재 그림과는 사뭇 다른 그림과 접한다. 제(題)하여 ‘황려호(黃驪湖)’다. 황려호는 여주(驪州)를 흐르는 남한강을 이르는 지명이다. 행호(幸湖), 동호(東湖)에서 보듯 강의 유속이 느리고 그 폭이 넓어 마치 호수와 같은 강이라서 황려강 대신 황려호라 했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여주를 부르는 이름은 다양하게 바뀌어 왔다. 골내근(骨乃斤), 황효(黃驍), 영의(永義), 황려(黃驪), 여강(驪江), 여흥(驪興), 여성(驪城), 황리(黃利) 등을 거쳐 여주(驪州)가 되었다. 이곳 지명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글자가 여(驪) 자이다. ‘검은 말’을 뜻하는 글자라 한다. 검은 말과 여주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다행히 동국여지승람에 힌트가 있다. 여주목 고적(古跡) 조에는 마암(馬巖: 말바위)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내용은 이렇다.

“말바위는 주 동쪽 1리에 있다. 이야기에 전하기를 황마(黃馬; 누런 말)와 여마(驪馬; 검은 말)가 물에서 나왔기에 이로 인해 군 이름 붙이기를 황려라 하였고 바위도 마암(말바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馬巖: 在州東一里 談傳; 黃馬驪馬出水 因名郡爲黃驪 巖之得名以此)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雙馬雄奇出水涯(쌍마웅기출수애)
두 말이 웅건, 기이하게 물가에서 나오니
縣名從此得黃驪(현명종차득황려)
현 이름은 이를 따라 황려(黃驪)라 했다네
詩人好古煩徵詰(시인호고번징힐)
시인은 옛것 좋아하여 까탈스럽게 증거를 따지지만
來往漁翁豈自知(래왕어옹기자지)
오가는 늙은 어부 어찌 제 알리요

란 내용이 있다.

 

답사 지도 1. 
답사 지도 2. 

이규보가 살던 800여 년 전 고려 시대에도 황려(黃驪)라는 지명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던 지식인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여지승람 고적조에는 이어서 사우당(四友堂)이라는 당(堂)을 소개하고 있는데, 사우란 경(耕)-목(牧)-어(漁)-초(樵) 네 벗을 뜻한다. 초야에 묻혀 욕심 없이 살려는 선비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거기에도 마암(馬巖)이 등장하고, 이색(李穡)의 시에도 마암(馬巖)이 등장한다.

“물을 막는 공은 마암석(馬巖石)이 높고, 하늘에 뜬 형세는 용문산(龍門山)이 크구나.” (捍水功高馬巖石 浮天勢大龍門山)

 

여주 옛 지도. 

마암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흥 민씨 시조와 관련된 전설에도 등장한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 괴이하게 생긴 바위가 바로 마암(馬巖)인데 근처 암혈에서 여흥 민씨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구전의 이야기가 있다 한다. 이래저래 여주라는 지명은 마암(馬巖)과 그곳 물가에서 나타났다는 두 마리 전설의 말로 귀착된다.

 

신륵사 삼층탑.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마암 건너 봉미산 자락의 고찰 신륵사(神勒寺)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벌써 눈치채신 독자도 있을 것이다. 어찌해서 고삐를 나타내는 글자 륵(勒)을 절 이름에 쓴 것일까? 누군가가 만들어 낸 구전의 전설에는 마암(馬巖)에서 나와 날뛰는 용마(龍馬)에게 재갈(勒)을 물린 신륵사 스님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곳에서 열반한 나옹선사라기도 하고 다른 선사 이름도 오르내린다. 어쩌면 신륵사의 륵(勒)자는 미륵불(彌勒佛)의 륵(勒)이 아니라 황려에 물린 재갈일지도 모른다.

그림 1. 겸재 작 ‘황려호’. 

‘황려호’는 실제 풍경을 그린 걸까, 아닌 걸까

이제 겸재의 그림 황려호를 살펴 보자(그림 1). 우뚝한 산줄기가 흘러내려 오는 끝으로 집 두어 채가 보이고 나무를 반듯하게 다듬어 만든 사립 울타리와 지게문(戶) 한 짝이 반듯하게 올려세운 문기둥에 달려 열린 채로 있다. 나무 울타리 곁에는 규모는 작아도 반듯반듯하게 정리된 밭들이 보인다. 앞쪽으로는 강(또는 호수)이다. 집으로 들어가는 나무다리도 보인다. 그런데 집은 아무리 보아도 어떤 집인지 판단이 잘 안 된다. 우리의 기와집도 아니고 둥근 초가집도 아니다. 울타리와 사립문도 우리네 농촌집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반듯하다. 그림 스타일은 이제까지 보아온 겸재의 진경산수화도 아니다. 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겸재가 그림 속에 써 넣은 화제(畵題)를 읽어야 한다.

漠々水田飛白鷺 넓디넓은 무논에는 백로가 날고
陰々夏木囀黃鸝 그늘 짙은 여름 숲엔 꾀꼬리 지저귄다

이 칠언(七言)의 대련구(對聯句)는 무엇일까? 이는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소개된 당시(唐詩) 300수(首) 속 성당(盛唐: 당 시가 가장 번성하던 시기) 때 왕유(王維)의 시 적우망천장작(積雨輞川莊作: 장마에 망천장에서 지음)의 한 구절이다. 그림 황려호를 알기 위해 왕유의 이 시를 읽어 보자.

積雨輞川莊作(적우망천장작) 장마에 망천장에서 지음
積雨空林煙火遲: 장마 속 빈 숲에 밥 짓는 연기 느리게 피어오르고
蒸藜炊黍餉東菑: 명아주 찌고 기장밥 지어 동쪽 밭으로 보낸다.
漠漠水田飛白鷺: 넓디넓은 무논에는 백로가 날고
陰陰夏木囀黃鸝: 그늘 짙은 여름 숲엔 꾀꼬리 지저귄다.
山中習靜觀朝槿: 산중에 고요 익혀 아침 무궁화를 관조하고
松下清齋折露葵: 소나무 아래 마음 씻고 이슬 젖은 아욱을 뜯는다.
野老與人爭席罷: 이 시골 노인네 남들과 자리다툼 그만두었거늘
海鷗何事更相疑: 갈매기는 어이하여 아직도 의심하는고.

왕유가 종남산 망천장에 은거하여 유유자적하며 쓴 시이다.

왕유는 이백(李白), 두보(杜甫)와 함께 성당(盛唐) 시기를 대표한 시인이었다. 이들 3인은 각각 그들의 시(詩) 특징에 따른 별칭이 전해지는데 이백은 시선(詩仙), 두보는 시성(詩聖), 왕유는 시불(詩佛)이었다. 그는 시인이자 화가이며 불교 신자였다. 출가는 안 했지만 유마경의 유마힐(維摩詰)을 본받아 자(字)를 마힐(摩詰)이라 했다. 벼슬을 마친 후에는 장안(長安: 지금의 서안/西安)의 남쪽 종남산(終南山)의 망천(輞川)에 망천장(輞川莊)이라는 집을 짓고 은거했다.

일찍이 31세에 부인과 사별한 후 재취(再娶)하지 않고 평생 홀로 살며 망천장에서 흥이 일 때마다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그가 망천에서 지은 시 종남별업(終南別業) 20여 수와 망천장을 그린 망천도(輞川圖)는 소식(蘇軾, 1037∼1101)이 극찬한 것처럼 “시 중에 그림이 있고(詩中有畵) 그림 속에 시가 있는(畵中有詩)” 경지의 표현으로 수많은 사람의 입(人口)에 회자되었다. 망천도는 원본이 사라져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숱한 모사도(模寫圖)가 그려졌다. 심지어는 망천도와 무관한 산수화도 망천도란 이름을 붙이는 일도 많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후에 동기창과 막시룡에 의해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시조(始祖)로 추앙되었다. 그러나 왕유 본인은 자신의 그림과 시의 결합에 대해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자신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대인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북송 때 곽희(郭熙), 곽사(郭思) 부자는 산수화를 비롯한 화론집(畵論集) ‘임천고치(林泉高致)’를 펴냈는데 거기에는 그림의 제재로 삼을 만한 진(晉), 당(唐) 시 16 편을 추천했다 한다. 이 중 왕유(王維)와 가도(賈島)의 시는 화제로 인기를 얻었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의 선비 세계의 로망 중 하나는 시은(市隱)이었다, 왕유처럼 은거는 할 수 없으니 한양에 살면서 그림과 시를 통해 은거하는 것 같은 그윽한 생활을 동경했던 것이다. 이런 풍조는 마침 명나라 동기창(董其昌)의 그림과 화론이 조선에 영향을 주니 이른바 시나 글을 그림으로 그리는 시의도(詩意圖), 문의도(文意圖)가 조선에 풍미되었다 한다.

당대 최고 인기 작가 겸재는 이 흐름의 큰 축을 이루었다 한다. 당나라 말기 시인 사공도(司空圖)의 시품(詩品)이라는 24편의 시를 화첩으로 그렸고(사공도시품첩 / 司空圖詩品帖), 소상팔경도나 귀거래사도 빠뜨리지 않았다. 특히 당시(唐詩)를 그림으로 그린 시의도(詩意圖)는 진경산수 이외에 사의산수화나 고사인물도와 함께 많은 그림이 남아 있다.

가도(賈島)의 심은자불우(尋隱者不遇)를 그린 송하문동자(松下問童子), 왕유의 도원행(桃園行)을 그린 초객초전(樵客初傳), 월명송하(月明松下), 이상은의 방은자불우성(訪隱者不遇成)을 그린 기려도(騎驢圖), 최국보의 소년행(少年行)을 그린 소년행, 송지문의 영은사(靈隱寺)를 그린 절강관조도(浙江觀潮圖), 왕유의 종남별업(終南別業)을 그린 좌간운기(坐看雲起), 이런 그림 중 하나가 바로 적우망천장작(장마에 망천장에서 지음)을 그린 ‘황려호’이다.

 

그림 2. 동기창 ‘왕유시의도’.

이 시를 보면 종남산 별업(別業: 別墅)인 망천장에서 장마 중 은자의 한가한 마음을 읊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저 그림 속 산은 서안(西安) 남쪽 종남산이고 그려진 집은 왕유의 종남별업(終南別業)일 것이다. 참고로 두 점의 참고할 그림이 있다. 그림 2는 명나라 동기창(董其昌)의 ‘왕유시의도’이다. 화제가 쓰여 있는데 바로 왕유의 시 ‘적우망천장작’이다. 어쩌면 겸재에게 영향을 미친 그림일지도 모른다. 산의 생김새와 집의 생김새, 그 위치에 유사점이 있다. 또 한 점은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적우망천장작’(그림 3)이다. 화제(畵題)로 쓰여 있는 글귀도 겸재의 황려호에 실려 있는 왕유의 시구 바로 그 구절이다(漠々水田飛白鷺 陰々夏木囀黃鸝).

 

그림 3. 강세황 작 ‘적우망천장작’.

그런데 겸재의 황려호를 설명한 자료들은 여주 어딘가를 그린 그림이라는 설명이 따른다. 과연 그럴까? 필자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오해는 겸재의 그림 위에 붙어 있는 5편의 오언절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 시들을 읽어 보자. 5편은 각각 다른 운(韻)을 사용하였다. (평성 庚운, 평성 尤운, 평성 虞운, 평성 元운, 평성 庚운)

夏景嘉可悅, 況聞黃鳥鳴. 緩步靑林下, 超然畎臥情.
여름 풍경 아름다워 즐길 만한데
게다가 꾀꼬리 울음까지
푸른 숲 아래 느긋이 걸으니
논밭 정경에 마음 초연하다.

茅茨更幽靜. 門外繫孤舟. 嗟哉駟馬客, 風塵久淹留.
초가지붕은 깊고 그윽하고
문 밖엔 배 한 척 매어 두었네
아! 말 네 필이 끄는 수레를 탄 객은
풍진 세상에 오래도록 몸담고 있구먼.

吾曹各相離, 渺々黃鸝湖. 音容日云曠, 世途何崎嶇.
우리는 서로 헤어져 있는데
황려호(黃驪湖: 여주 남한강)는 아득히 멀기만 하네
목소리도 얼굴도 함께 한 날 오랜데
세상 길은 어찌 기구한 건가.

淇竹爲君咏, 君子難可諼. 毋忘切磋義, 早入聖賢門.
기수(淇水)의 대나무는 그대 위해 읊은 것
군자여 잊기 어렵겠지
절차탁마 그 뜻을 잊지 말고
성현의 문으로 어여 드시게.

朝日上踈柳, 淸池濯塵纓. 悠々百年內, 願君勤令名.
아침 해 성근 버드나무 위로 떠오르니
맑은 못에 세속의 갓끈을 씻어내네
유유히 백년 지내며
원컨대 그대여 멋진 이름 권면하시게.

壬子孟秋十九日, 伯春書華伯詩歸伯玉
1732년 (영조 8) 7월 19일, 화백(華伯)의 시를 백춘(伯春)이 써서 백옥(伯玉)에게 준다.

여기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시를 지은 사람은 화백이고, 글씨를 쓴 사람은 백춘이며 겸재의 그림과 그 위에 붙어 있는 이 시를 받은 사람은 백옥이다. 가까웠을 이들 세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백춘은 이미 그림 미호(渼湖)를 접할 때 설명한 석실서원의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이다. 신임사화로 노론 4대신이 참화를 당할 때 종조부 김창집이 사사(賜死)되고 집안이 풍비박산 나자 과거(科擧)도 접고 석실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장동 김씨로 전대에 후원을 받았던 겸재와는 잘 아는 사이였을 것이다.

시를 지은 화백은 원주 원씨 원경하(元景夏, 1698~1761)이다. 그림에 적혀 있는 1732년에는 향리인 여주에 머물면서 과거 공부에 매진할 때였다. 1736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그림을 받은 백옥은 해주 오씨 오원(吳瑗, 1700~1740)이다. 1728년 이미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고 있었다.

 

신도비 뒷면에 손자 원경하가 쓴 추기(追記).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글에 적혀 있는 임자년(1732년) 어느 날 세 사람은 만났을 것이다. 아마도 김원행이 있는 석실이거나 원경하의 여주였을 것 같다. 한강의 뱃길은 한나절이면 이들을 연결해 주었을 것이다. 이미 관직에 나가 새로운 직을 맡을 오원을 위해 원경하는 오언절구 5수를 지어 왔다. 이를 본 김원행은 이를 써서 겸재의 그림에 붙여 오원에게 주었을 것이다. 이 그림은 아마도 미호에 은거해 있던 김원행을 위해 은자의 삶을 산 왕유의 시를 모티브로 겸재가 그려 보낸 것이리라. 오원에게 주려고 김원행이 겸재에게 그림을 청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사리가 맞지 않는다. 겸재의 그림은 은자의 삶을 그린 것이고 원경하의 시는 젊은 관원의 앞날에 징표가 될 시경(詩經)의 말씀을 새긴 글이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사실 원경하의 시 속에 나오는 황려호(黃驪湖)로 이 그림 제목을 삼는 것도 어울리는 일 같지는 않다.

원주 원씨의 집성촌인 상구리.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황려호 대신 찾아가보는 여주의 원씨 집성촌

각설하고, 황려호 그림 속을 찾아 어디로 갈 것인가? 마땅히 서안 종남산 망천장 터를 찾아가야 할 것 같은데 기왕에 그림 명(名)이 황려호이니 꿩 대신 닭으로 원경하의 여주를 찾아보기로 한다. 원경하의 원주 원씨 집성촌은 대신면 상구리(上九里)이다. 여주전철역에서 10시에 버스가 있다. 버스를 놓치면 택시를 타야 하는데 편도 요금이 2만 3000원쯤 나오는 거리이다. 마을은 산으로 폭 둘러싸인 삼태기 같은 마을이다.

 

마을 입구 산길에 둔촌동문(屯村洞門)이라 새겨진 바위가 있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효종의 부마 원몽린(元夢麟)의 묘.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마을이 시작되는 산길에 둔촌동문(屯村洞門)이라 각자한 바위가 있다. 우측 재실로 보이는 기와집 뒤로 무덤이 보인다. 원경하의 조부인 효종의 부마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麟)과 효종의 5녀 숙경공주(淑景公主)의 합장묘이다. 아래로는 신도비가 서 있다. 뒷면 음기에는 손자 원경하가 쓴 추기(追記)도 보인다. 동네 토박이 이야기를 들으니 이 일대가 원주 원씨 사패지라 한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묘역비에도 원경하의 이름이 보인다. 막상 본인은 성남시 수정구에 묻혔다. 아마도 화백(華伯) 원경하는 집안에서도 글 잘하는 이로 이름을 떨쳤던 것 같다.

이제 마을 옆에 있는 골프장 블루헤런 앞길로 고개를 넘어간다. 골프장에는 고려 때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과 자그만 승탑이 서 있다. 승탑에는 호봉당(虎峰堂)이라는 법명이 적혀 있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수 흥국사 부도전에도 호봉당 부도가 있는데 동명이인인지 아니면 사리를 나누어 봉안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없다.

 

고달사 터.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 골프장 안에는 또 하나 전설로 전해지는 우물이 남아 있다. 이름은 어수정(御水井). 임금께서 마신 우물이다. 어느 임금이 이 물을 마셨을까? 역사의 기록은 아니나 이 지역 민초들 가슴에 새겨진 임금 단종(端宗)께서 유배길에 마신 물이라 한다. 단종의 유배길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 물이 어수정이라면 여기서 한여름 갈증을 푸시고 고개를 넘어 고달사 지나 주암리를 지나가신 것이리라. 이제는 잘 포장되고 거의 직선화된 고갯길을 넘어 고달사지로 간다.

 

어수정 자료사진. 
고달사지로 가는 길, ‘단종 유배 길’로 흔히 알려져 있다.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혜목산(고래산) 아래 넓은 터가 아늑하게 펼쳐져 있다. ‘봉은본말사지’에 따르면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신라 말 고승 원감국사(圓鑑國師) 현욱(玄昱: 788~869)이 중국에서 귀국하여 이곳에 28년간 머물면서 사세가 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新羅景德王二十三年, 甲辰刱 圓鑑國師自華歸國 居于慧目山). 원감국사 현욱은 신라 귀족 출신으로 중국에 유학하여 마조(馬祖) 계의 백암장경(百巖章敬)의 심인(心印)을 전수받은 법사(法嗣: 정식 법통을 이은 後嗣)이다.

만년에 그 법은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 855~923)에게 전해지고, 진경대사의 법은 다시 원종대사(元宗大師) 찬유(瓚幽)에게로 전해져 꽃을 피웠다. 당시에는 당(唐)의 유학승들로부터 전해진 선종(禪宗)이 신라 불교의 주류를 이루어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열렸는데 이곳 고달사에 세 스님으로 이어지는 혜목산문(慧目山門)을 별도의 산문으로 본다고 한다. 한편 2세인 진경대사는 창원 봉림사(鳳林寺)에 봉림산문을 개창하였다.

원종대사가 이곳에서 주석할 당시인 고려 광종 22년(971년)에 황제는 조칙을 내려 ‘국내 사원 중에 도봉원, 고달원, 희양원 오직 3곳은 전통을 지켜 문하의 제자들이 상속하여 대대로 주지가 되도록’ 하였다. 이른바 황제의 칙령을 받은 부동사찰(不動寺刹)로서 중요성이 인정된 사찰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고달사의 위용은 높았다. 다행히 복원한 원종대사의 비문에는 이런 내용을 비롯하여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많은 자료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던 고달사는 대각국사 의천의 천태종에 가담했다가 점차 지방의 이름 없는 절로 전락해 갔던 것 같다. 동국여지승람까지는 기록에 남았던 고달사가 범우고(梵宇攷: 1799년)에는 폐사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쉽게도 모든 것은 시간 속에 사라지고 남은 잔해들은 문화재가 되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48편 참고하세요. 인터넷 검색 가능함)

 

골프장 내 승탑.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국보 4호와 보물 7호로 지정된 승탑(僧塔, 浮屠) 2기(基)
*보물 6호로 뛰어난 솜씨의 비석의 귀부(龜趺) 및 이수(螭首)와
*소박한 귀부(龜趺). 파손되어 중앙박물관에서 복원된 원종대사탑비
*보물 8호 부처의 앉을 자리인 석조대좌(石造臺座)
*중앙박물관 뜰로 옮겨진 보물 282호 쌍사자석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석조(石槽) 2기(基) 등
고달사에 대해서는 다산의 시를 비롯하여 몇 편의 시가 전해지는데 원곡(耘谷) 원천석이 이 절에 주석하던 의징(義澄) 대선사에게 보낸 시 한 편 읽고 가자.

奉寄高達寺李大禪師 義澄 (고달사 이대선사 의징에게 받들어 부침)
回首遙看慧目山. 一堆蒼翠白雲間. 就中知有天台老. 贏得強剛百歲閑.
머리 돌려 멀리 혜목산을 바라보니
한 언덕 흰구름 사이 푸르고 푸르네
그 가운데 천태(종) 노승 게 있음 알겠고
굳세고 강건하여 백세가 아름답네

 

원호장군 승전비.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런 인연들도 사라지고 이제는 빈터만 남은 고달사 터를 떠나 황려호를 보러 신륵사(神勒寺)로 간다. 천년 고찰은 여강(驪江) 가에 변함없이 아름답다. 그곳에는 임진란 때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구국의 길로 나선 원주 원씨 원호장군 승전비가 서 있다. 그러나 신륵사는 오늘의 주제가 아니므로 글은 여기에서 맺기로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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