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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109) 청와대] 영빈관 터는 정조의 ‘새 할머니’ 기리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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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32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2.09.30 09:21:16

(이한성 옛길 답사가)

 

청와대가 문을 열었다. 겸재 그림 길을 찾아 나선다. 대은암(大隱巖), 독락정(獨樂亭), 취미대(翠微臺), 은암동록(隱巖東麓)을 비롯해서 이미 살핀 바 있는 육상궁(毓祥宮)과 인왕제색(仁王霽色)도 다시 한 번 살피는 기회가 되었다.

필자가 다닌 북악산 기슭 모교의 교가는 이렇게 시작한다. “대은암(大隱巖) 도화동(桃花洞) 이름난 이곳 북악을 등지고 솟아난 이 집~~”. 그때나 지금이나 이 교가 속 지명은 참 아리송하기만 하다. 겸재의 그림을 찾아가다 보면 그 답을 알게 되려나?

우선 겸재의 그림을 이해하려면 현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와 물길, 능선 길을 아는 게 도움이 된다. 청와대 자리가 역사의 한 페이지에 등장한 때는 고려 때부터이다. 아마도 한성백제와 신라의 북한산주 시절에도 역사는 있었을 것이지만 아쉽게도 기록이 없으니 언급할 수가 없다.

고려 시대엔 나라의 흥망이 풍수지리와 도참에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이 컸기에 문종(文宗: 재위 1046~1083년)은 1067년 한양에 남경유수부(南京留守府)를 설치하고 이듬해 신궁(新宮)을 지었다. 그 자리를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보고 있다. 그의 아들 숙종(肅宗: 재위 1095~1105년)은 남경으로 천도를 추진하였고 이어서 예종(睿宗), 인종(仁宗), 의종(毅宗)도 남경 왕궁에 자주 순행(巡幸)하였다.

 

겸재 작 취미대(국박 소장본).
겸재 작 취미대(간송 소장본).
겸재 작 ‘은암동록’.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다시 한 번 남경 천도를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나라는 조선으로 넘어갔다. 이후 한양 천도가 이루어지고 경복궁이 세워지니 지금의 청와대 자리는 경복궁 신무문(神武門) 밖 후원으로 임진란(1592년)까지 궁궐의 일부였다.

그러나 경복궁마저 폐허로 변하고 고종 연간에 다시 중건될 때(1865~1868)까지 270여 년 간 버려지니 이곳 경복궁 후원은 민간인이 거주하고 산림이 훼손되기도 하는 지역으로 전락하였다. 위에 언급한 겸재의 그림들은 이 시기에 경복궁 후원에서 집 짓고 살고 한유(閒遊)한 이들의 한 가닥 기록인 셈이다. 시문(詩文)도 있고 그림도 있다.

 

겸재 작 ‘육상궁’도.

그 후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 청와대 터는 궁장(宮墻)으로 담을 쌓으니 다시 민간인이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 되었다. 조선이 망한 후 1912년 경복궁은 조선총독부 차지가 되었다. 이 시기 방치된 후원에 간간히 민간인들이 들어가기도 했으나 1939년 조선총독 관저가 이곳에 세워지고, 해방 후 이곳은 미군 하지 중장의 관저로 쓰였고, 이어서 이승만 대동령의 관저가 된 후 경무대는 민간인이 갈 수 없는 지역이 되었다. 그 후 문 대통령 시절까지도 국민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이제는 청와대도 열렸다. 그런데 분명 청와대 안쪽 어딘가와 인접 지역을 그렸을 겸재의 그림은, 설명하는 분마다 위치가 다르거나 애매하고, 설명 자료를 들고 청와대 답사길에 나서도 어디를 말하는지 알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자료들이 청와대 개방 전 어림으로 설명한 자료들이다 보니 그렇겠지만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돌아오기를 거듭한다.

 

겸재 작 ‘인왕제색’도.
겸재 작 대은암(국박 소장본). 
겸재 작 대은암(간송 소장본).

 

정황 작 대은암. 
독락정(국박 소장본).
독락정(간송 소장본).

 

우선 겸재 그림에 접근하기 위해 청와대와 인접 물길을 살피려 한다. 그림 1을 보자. 영조 연간에 발간된 도성대지도이다. 필자가 붉은 펜으로 원을 그린 지역이 지금의 청와대 권역이다. 원 밖 좌측 창의문에서 흘러내리는 백운동천(白雲洞川: 포장된 자하문로) 옆에 소현묘(昭顯廟: 소현세자, 강빈 사당)가 보이고 이내 육상궁(毓祥宮: 영조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 고종 이후 이른바 칠궁)이 보인다. 그리고 동쪽 산줄기 아래 대은암(大隱巖)이 기록되어 있다.
 

그림 1. 영조 시대의 도성대지도.

대은암은 도대체 어떤 바위일까

그림 2를 보자. 고산자의 수선전도(首善全圖)다. 경복궁의 북문 신무문(神武門)이 보이고 앞으로는 백악산이 우뚝하다. 서쪽 산줄기 아래에 연호궁(延祜宮)과 육상궁(毓祥宮)이 보인다. 연호궁은 영조의 후궁 정빈(靖嬪) 이씨의 사당이다. 그녀는 영조의 첫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출산하였다. 효장세자는 10세 어린 나이에 명을 다했다. 사도세자의 배다른 형(兄)이다.

 

그림 2. 현종 연간의 수선전도.

정조는 죄인의 자식이었으므로 사도세자의 아들로서가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이 된 후 왕위를 이어 받았다. 효장세자는 임금의 아버지이므로 진종(眞宗)으로 추존되었다. 사도세자는 왕으로 추존되지 못하다가 오랜 세월 뒤 고종 때 와서 추존되어 장조가 되었다. 정조는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이 연호궁은 고종 때 육상궁에 합사되었다. 위치로 보면 지금의 청와대 영빈관 앞쯤 되는 곳으로 보인다. 이후 아들이 임금이 된 칠인의 후궁 사당은 흔히 칠궁(七宮)이라 부르게 되었다. 칠궁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으니 청와대 주변 지리를 살피는 데 중요한 랜드마크가 된다. 연호궁과 육상궁 동쪽 산줄기 앞에는 역시나 대은암(大隱巖)이 보인다. 대은암은 청와대 동쪽 산줄기 어딘가에 있는 바위임을 알 수 있다.

 

그림 3. 청와대 주변의 물길과 능선길.

그림 3은 필자가 청와대 주변 산줄기와 물줄기를 간단히 그린 것이다. 겸재의 그림 설명은 이 지도로 설명하려 한다. 북악산에서 서울 시내로 흘러내리는 큰 물줄기는 동서(東西)가 있는데 동은 삼청동 물줄기이며, 서는 창의문께에서 발원하여 서촌의 앞길로 흐르는 물줄기로서 이 동서 두 물줄기가 청계천의 발원(發源)이 된다.
 

겸재도 거닐었을 청와대 본관 일대.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청와대 관저.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청와대 안팎을 흐르는 네 물줄기

그 안쪽으로 작은 물줄기들이 있는데 번호 1로 표시한 물줄기는 북악산 서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경기상고와 경복고를 지나 효자동 골목길을 경유해 경복궁으로 들어간다. 이제는 모두 지하에 묻혀 맨홀로 남았다. 이 물줄기에 청송당(聽松堂)이 있었다. 경기상고 동북쪽 담 아래에 해당된다. 편의상 청송당 물줄기라 하자. 바로 이 물줄기 주변이 예전 유란동(幽蘭洞)이다. 겸재가 태어나고 자란 지역이다.

번호 2 물줄기는 칠궁 등산로 서쪽 철 펜스 뒤에 있다. 칠궁 등산로를 오르내리다 보면 서쪽 철 펜스 아래로 가파른 작은 계곡이 보인다. 평소에는 대개 건천(乾川)인데 우기에는 상당한 계곡수를 흘리는 곳이다. 창의문길 42(청운동 산 1-1번지) 주변이다. 입구에는 대경빌라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아쉽게도 철 펜스로 가로막혀 다가갈 수 없다. 그저 칠궁 등산로를 오르며 숲 사이로 넘겨다 볼 뿐이다. 겸재를 찾아가는 길은 아직도 막혀 있다.

 

청와대 경내의 이 물줄기가 만리뢰 계곡일까.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필자의 학창시절에는 토요일 오후 가끔씩 올라보던 길이다. 그때는 철이 없어 그냥 가 보았을 뿐…. 향토 사학자 김영상 선생의 ‘서울 600년’과 대통령 경호실에서 발간한 ‘청와대 주변의 역사문화 유산’에는 이 골짜기에 새긴 각자들이 소개되어 있다. 武陵瀑(무릉폭), 桃花洞天(도화동천), 岳麓(악록), 雙溪洞(쌍계동), 鳴玉泉(명옥천), 醒巖(성암), 山光如邃古 石氣可長年(산광여수고 석기가장년: 산 빛은 깊은 옛날 같고 돌 기운은 가히 오래구나) 등등. 또 칠궁 뒤에는 洗心臺(세심대)란 각자도 남아 있다 한다. 편의상 이 칠궁 서쪽 대경빌라 골짜기를 도화동 물줄기라고 하자.

 

번호 3의 물줄기는 청와대 본관 건물 뒤 작은 골짜기이다. 경호실 자료에 의하면 골짜기 주변에 큰 바위도 있고 수조(水曹)도 있다 한다.

번호 4 물줄기는 청와대 경내에서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가장 큰 물줄기이다. 청와대 경내는 동서 두 지역으로 자연스럽게 나뉘는데 그 경계는 북악산에서 수궁터로 내려오는 산줄기이다. 그럼으로써 본관(청와대) 구역이 자연스레 산줄기에 쌓여 있고, 관저 지역도 산줄기에 쌓여 있다. 본관 지역에 비해 관저 지역은 시냇물이 마르지 않는다. 따라서 상춘재와 침류각이 있고 넓은 정원 녹지원도 있다. 개울 위로는 두 개의 돌다리도 놓았고 개울가에는 모옥(茅屋)을 연상시키는 정자도 있다. 청와대 내에서는 가장 자연친화적인 공간이다. 산세도 비교적 안정되어 경내 산책 내지 트레킹도 할 수 있는 코스가 있다. 오운정과 총독부 시절 가져다 놓은 미남불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청와대 인근을 부른 옛 지명 ‘대은암동’

이렇게 네 개의 물줄기를 보았으니 이제 능선 길을 보자. 북악산 등산로는 전호에서 소개했듯이 청와대 구역 밖에 있다. 가장 짧은 코스는 청와대 담을 끼고 도는 길이다. 동편으로는 춘추관에서 오르는 길이고, 서쪽으로는 칠궁 밖에서부터 오르는 길이다. 두 능선 길이 만나는 지점에 쉼터 북악정을 만들어 놓았다. 북악산 정상 도전은 이곳 북악정에서 시작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살피고 편의상 동쪽 능선 길을 춘추관 능선, 서쪽 능선 길을 칠궁 능선이라 하자.

이렇게 하면 예나 지금이나 경복궁 후원, 즉 청와대 경내는 칠궁 능선과 춘추관 능선 사이가 된다. 조선 시절에는 춘추관이 없었으니 그때 표현을 빌리면 은암동록(隱巖東麓)이 된다.

 

청와대 춘추관을 끼고 올라가는 능선.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이 정도 지식을 갖추었으면 이제 겸재 그림을 만나러 가자. 우선 대은암부터 시작이다. 지금의 청와대 구역 전체를 통칭하여 옛사람들은 대은암동이라고 불렀다. 그 유래가 동국여지승람에 전해진다.

“대은암(大隱巖), 만리뢰(萬里瀨) 모두 백악산(白嶽山) 기슭에 있는데, 곧 영의정 남곤(南袞)의 집 뒤이다. 박은(朴誾)이 이름을 붙이고 시를 짓기를, “주인이 산봉우리에 있는데, 우리 집 향 피우는 화로라네. 주인이 계곡에 있는데, 우리 집 낙숫물이라네. 주인이 벼슬 높아 세력이 불꽃 같으니, 문 앞에 거마(車馬)들 많이도 문안 왔네. 3년 가야 하루도 동산은 들여다보지 않으니, 만일에 산신령 있다면 응당 꾸지람을 받았으리. 손이 왔는데 다른 사람 아니고 주인의 친구로세. 문 앞을 지나며 들어가지 않는 것도 차마 할 수 없고, 발걸음 당장 돌리는 것도 도리 아니라. 바위 사이에서 잠시 쉬니, 풍경은 참으로 뜻밖에 만났네. 물결이 감추어져 안개로 쌌다가 나를 위하여 열리니, 울던 학과 우는 원숭이 놀라지도 않누나. 주인이 금옥(金玉) 있으면, 열 겹으로 싸 두어 누구에게 함부로 주리오. 자물쇠 굳게 봉하여 밤중에도 지키나. 시내와 산에 한낮이 옮아간 줄을 모르네. 앉아 있은 지 오래매 날 저무는데, 흰 구름 먼 산에서 일어나네. 무심하기는 내가 저 구름보다 못하고, 자취 있으니 스스로 부끄럽네” 하였다.

“대은암 앞에 쌓인 눈은, 봄 들어 또한 경치일세. 우연히 흥이 나서 놀러 왔고, 주인과는 기약도 없었네. 혼자 서 있으니 우는 새 가까이 오고, 길게 읊자니 붓 들기 더디어지네. 그대 집에서는 나의 방광(放曠)함을 용납하겠지만, 지금 사람들 해괴하게 여길까 두렵네” 하였다.
(기존 번역 전재)

大隱巖, 萬里瀨. 俱在白嶽山麓. 卽領議政南衮舍後. 朴誾名之. 題詩曰: “主人有峯巒,吾家之熏爐. 主人有澗谷, 吾家之簷溜. 主人官貴勢熏灼, 門前車馬多伺候. 三年一日不窺園, 儻有山靈應受詬. 客來非異人, 曾與主人舊. 過門不入亦不忍, 沿溪返棹計亦謬. 巖間得少憩, 景物眞邂逅. 湍藏霧斂爲我開, 鶴唳猿啼不驚透. 主人有金玉, 什襲豈輕授? 緘縢固鐍守夜半, 未信溪山移白晝. 坐久日向晩, 白雲生遠岫. 無心我不如, 有跡誠自疚”.

“大隱巖前雪, 春來又一奇. 偶因淸興出, 不與主人期. 獨立鳴禽近, 長吟下筆遲. 君家容放曠, 却恐駭”.

조금 설명을 붙이면 종종 때 영의정 남곤(南袞)이 있었다. 그는 뛰어난 문장가였는데 이 글로 보면 새벽부터 출근하여 일하느라 그 좋은 백악산 골짜기에 살면서도 자연을 모르고 산 ‘워커홀릭’이었던 것 같다. 조선 관원의 근무 시간이 묘사유파(卯仕酉罷: 묘시에 출근, 유시에 퇴근)였으니 오버해서 근무했다면 그럴 것도 같다. 남은(朴誾)은 친구 이행(李荇)과 자주 남곤 집 동네에 찾아갔는데 갈 때마다 친구 남곤의 얼굴 한 번 못 보고 돌아오니 은근히 그를 딱하게 생각한 듯하다. 그래 시 한 수 읊었다.

 

청와대 본관 뒤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주인은 산봉우리를 소유하고 있지만 主人有峯巒
내 게는 향 사르는 화로지 吾家之薰爐
주인은 산골 물 가지고 있지만 主人有磵石
내게는 처마 끝 낙수로다 吾家之簷溜

속동문선에 있는 남은의 만리뢰 두 수의 율시 중 한 수만 읽고 가자.

대은암 앞의 눈 大隱岩前雪
봄 오니 또 기이하구나 春來又一奇
우연히 맑은 흥이 솟아났지만 偶因淸興出
주인과 함께 기약한 건 아니라오 不與主人期
혼자 서 있으니 새 가까이 우네 獨立鳴禽近
길게 읊조리나 붓 들기 더디어라 長吟下筆遲
그대 집에서 거리낌 없는 말도 받아주지만 君家容放曠
놀래킬까 오히려 두려워하네 却恐駭今時

남곤은 중종의 의중을 파악하고 정암 조광조 탄핵에 앞장섰는데 후에 조광조를 받드는 사림파가 실권을 잡자 삭탈관직 당하고 오늘날까지 소인배의 대명사가 되어 있다. 어찌 보면 요즈음 정치 세력보다도 더 심한 패거리 문화의 한 단면이다.

후에 남곤의 이 지역은 여러 사람을 거쳐 신응시(辛應時)의 소유가 되었다. 그 후손 백석 신태동은 이곳에 살았는데 삼연(三淵)과는 자주 어울린 사이였고 금강산 여행길에는 겸재를 참석시켜 ‘신묘년 풍악도첩’을 탄생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청와대 경내 지역을 일컬어 대은암동이라 했는데 어디를 일컬어 대은암과 만리뢰(萬里瀨: 만리 물길)라 한 것일까? 앞서 지도에서 보았지만 대은암과 만리뢰는 청와대 지역 지금의 녹지원과 상춘재 쪽 계곡을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대은암은 물론 이 골짜기 위 어느 바위를 지칭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어느 바위가 대은암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남은과 이행을 빼고는.

앞서 소개한 두 지도에서 보았듯이 대은암은 청와대 동쪽 지역인데 일성록 정조 19년(1795) 9월 3일 기록에 보면 ‘어제 산을 순찰하다가 대은암(大隱巖) 근처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었는데, 순산군(巡山軍)이 와서 “백악산 동쪽 첫 번째 성랑 근처가 무너졌습니다”라고 하였다. 대은암이 백악 동쪽임이 명백하다.

또 연암집에는 “의지(誼之, 이서영/李舒永), 원례(元禮, 한문홍/韓文洪)와 함께 밤에 백악(白岳, 북악산/北岳山) 동쪽 기슭에 올라 대은암(大隱巖) 아래 줄지어 앉았노라”라고 했으니 역시나 대은암은 북악 동쪽임을 알 수가 있다. 또 청음의 근가십영에도 대은암을 읊고 있다.

한 번 겹쳐 돈 바위가 푸른 절벽 에워싸고 一疊回巖擁翠壁
맑은 시내 돌을 쳐서 슬픈 옥이 우는구나 淸湍激石鳴哀玉
동천 속은 적막하여 사람 자취 드물거니 洞天寥寥人跡稀
솔 그늘에 진 그림자 푸른 이끼 빛이구나 松陰落影蒼苔色
술 흥에다 시의 정이 좋은 경치 만났거니 酒興詩情遇佳境
외로운 구름 저녁 새와 함께 돌아오는구나 孤雲夕鳥同還往
나의 집은 물 격해 (대은암과) 동서로 나뉘어 있고 吾家分住水東西
어느 날에 돌아가서 다시 찾으려는가 何日歸來更相訪

여기에서도 대은암은 물을 격해 동서로 나뉘어 있다 한다. 청음의 집 무속헌(無俗軒)은 육상궁의 서쪽, 지금의 교황청 대사관과 무궁화동산 일원이었다 하니 대은암은 역시나 동쪽에 있다는 말이다.

이제 겸재의 그림을 보자. 간송본과 국박본이 전한다. 두 그림 다 북악산 동쪽 산줄기가 자리 잡고 그 아래로 계곡이 흐른다. 반듯한 ㅁ 자(字) 기와집과 그 위로 초가집 정자가 보인다. 대은암으로 생각되는 바위도 그려 넣었다.

여러 기록과 이들 그림으로 볼 때 지금의 상춘대와 녹지원 옆 계곡수는 만리뢰(萬里瀨)이며 이 계곡 위 어딘가 바위가 대은암이었으리라. 아직도 대은암이 어느 바위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의견이 모이지 않았다. 또 기와는 누구네 집이었을까?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그나마 이곳에서 산 백석 신태동 가(家)일 가능성은 있다.

겸재의 손주 손암 정황도 할아버지의 필법으로 대은암을 그렸다. 산줄기 흐름으로 볼 때 지금의 녹지원 근처에서 그린 것으로 보인다. 어느 바위를 특정(特定)해 그린 것 같지는 않은데 손암의 시절에도 대은암이 어느 바위인지는 특정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대은암을 설명한 많은 자료들이 있는데 물길 1, 2, 3, 4 각자의 논리가 모두 다르다. 근거 있는 주장이면 그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만리뢰가 흐르는 지역은 터가 넓어 지금은 녹지원이 되었지만 경복궁이 중건된 후는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을 세워 과거를 시행하고 군사 훈련도 했다 한다.
 

칠궁 능선. 사진 = 이한성 옛길 답사가

독락정을 그린 겸재의 두 그림

다음 찾아가는 그림은 독락정(獨樂亭)이다. 두 장의 겸재 그림이 전한다.

국박본과 간송봉인데 모두 같은 그림본을 가지고 변화를 주어 그린 그림일 것이다. 북악산이 정면으로 보이고 부아악 바위는 조금 우측으로 보인다. 그런 앞 계곡수 옆에 모옥(茅屋)의 정자가 그윽하다. 북악산 네 골짜기 중 어느 골짜기에 세워진 정자일까? 어찌 보면 대은암이 있는 만리뢰와 비슷한 구도를 지니는데 곰곰 살펴보면 대은암 그림은 백악산 동쪽 능선 일부만을 그려 백악산 동쪽 골짜기임을 드러낸 반면, 독락정은 북악산 전체를 정면에 앉히고 부아악을 그린 후 정면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수를 그렸다. 만리뢰보다 북악산 서쪽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청송당 계곡은 북악산 서쪽에 치우쳐 있으니 물론 아니고 2번 대경빌라 뒤 도화동 계곡일까? 3번 청와대 본관 뒤 계곡일까? 다행히 이 골짜기에 독락정을 세우고 기록한 독락정기(獨樂亭記)가 전해진다. 장동 김씨 가문의 김수흥(金壽興)이다. 그의 문집 퇴우당집(退憂堂集)에 전하는 독락정기를 보자.

우리 집은 백악산 아래 자리했는데 터는 궁벽하다. 저자거리와 멀리 떨어져 있다. 집 뒤로 수십 걸음을 가면 골짜기가 깊고 고요하다. 골짜기 물은 맑고 차며 매번 밥을 먹고 난 여가에 짚신 신고 지팡이 짚고 물과 돌 사이를 소요하면서 울적한 기운을 풀었다. 우거진 숲의 무성함이 없어지면 노닐며 쉴 곳도 없어서 흥이 나면 홀로 갔다가 시름없이 바라보다가 돌아오곤 했다. 이제 처음으로 한 채의 초가집을 지으니 돌을 뚫고 물줄기를 넘어 바위 골짜기 위에 날개를 펼친 듯 자리하니 독락이라고 편액하였다. (후략)

獨樂亭記 我家白岳之下. 處地窮僻. 與闤闠絶遠. 屋後數十武. 洞府幽邃. 澗水淸泠. 每於退食之暇. 杖屨逍遙於水石之間. 以宣其湮鬱之氣. 而旣無樹林之陰翳. 未有流憩之所. 興來獨往. 未免悵望而歸矣. 今者始營一架茅茨. 鑿石跨流. 翼然臨于巖壑之上. 扁之曰獨樂.

김수흥은 장동 김씨 가문으로 청음 김상헌의 후손이다. 청음의 집 무속헌은 지금의 교황청 대사관과 청음의 시비(詩碑)가 있는 무궁화동산 일원이었다고 한다. 칠궁의 서쪽과 서남쪽에 걸쳐 있는 곳이다. 걸어도 몇 발자국 가지 않을 지금의 대경빌라 뒷계곡 도화동천일 것이다. 언젠가 이 계곡도 열리면 독락당 터를 찾으러 가 봐야겠다.

청와대 본관 뒤 산기슭을 그린 ‘취미대’

다음 찾아갈 그림은 취미대(翠微臺)다. 취미란 말은 산기슭이란 의미다. 연구자들 말로는 지금의 청와대 본관 뒤쪽 언덕이 취미대라고 한다. 우선 국박본을 보면 서쪽 능선에 한 선비가 앉아 마당 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마당은 지금의 청와대 대정원일 것이며 마당 한가운데 네모지게 돋아 있는 곳은 회맹단(會盟壇)으로 여겨지고 있다. 회맹단은 임금과 신하가 모여 신의를 약속하던 장소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간간히 회맹의 의식을 행한 기록이 보인다.
선비가 앉아 있는 언덕은 칠궁 쪽이며 앞쪽 능선은 백악산에서 소공원 쪽으로 흐르는 산줄기이다. 실제 모습보다는 많이 강조되어 있다. 선비의 좌측으로는 이제 청와대 본관 건물이 자리 잡았다.

두 번째로 간송본을 보자. 이번에는 청와대 본관 건물 뒤쪽 언덕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그렸다. 취미대에는 세 선비가 있는데 한 선비가 서서 앉은 두 선비에게 팔을 들어올리며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다. 무엇을 논하는 것일까? 지금의 대정원 앞으로는 경복궁 무너진 담장 뒤로 숲이 무성하다. 멀리 남산도 안녕이다.

대은암 동쪽 산줄기를 그린 ‘은암동록’

이번 그림은 은암동록(隱巖東麓)이다. 제목은 대은암의 동쪽 산줄기란 뜻이다. 이미 대은암은 번호 4 계곡 줄기라 했으니 그 동쪽 언덕 즉 녹지원 동쪽 상춘재, 침류각이 있는 지역과 관련이 있다. 그림을 보면 멀리 남산이 자리하고 우측으로는 관악산 삼성산이 아스라이 보인다. 부분 부분 무너진 경복궁 담장 사이로 문 터가 보이는데 아마도 신무문이 아닐까 한다. 이 그림은 은암동록에서 목멱산을 바라보며 그렸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겸재의 그림 두 점 보고 가련다. 하나는 ‘육상궁(毓祥宮)도’인데 남종문인화 풍의 걸작이라 한다.

또 한 점은 국보로 지정된 ‘인왕제색도’이다. 인왕제색도를 청와대 마당이나 북악산 기슭에서 바라보자. 인왕제색도를 그린 위치가 이곳이라는데 실제로 비교해 보면 각(角)이 맞지 않는다. 많은 책이 그렇게 쓰여 있고 심지어는 국영방송 특집도 이곳에서 그렸다 하는데 바로 잡히기를 희망한다. (다음 호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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