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노>는 한국 드라마사에 획을 그은 작품이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인물의 성격 규정이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은 한마디로 꼭 집어 선인-악인으로 나누기 힘들다. 도망 노비를 괴롭히는 잔악스런 추노꾼 이대길은 때로는 잡은 추노를 풀어주기도 하고, 돈만 아는 시장판의 껄렁패 천지호도 자기 부하의 원수는 끝까지 갚아주려 든다. 노비 출신 언년이는 끝까지 노비 출신을 혐오하고, 올바른 행동거지만 할 것 같은 최장군은 주모의 ‘달걀박이 밥’을 거절하지 않으며 자신의 음심에 때로 솔직하고 등등. 시종일관 악인으로 나오는 인물은 정치 모리배들, 문자 쓰는 양반들뿐이다. 나머지 보통 사람은 모두 선과 악의 경계선 위에서 줄타기 하듯 산다. 실제로 사람 사는 모습이 이렇다. 뼛속까지 착한 성인은 드물고, 온몸이 악으로 가득찬 악한도 드문 법이다. 더구나 한 치 앞을 모르고 장바닥에서 생존투쟁을 하는 ‘추노’의 상놈들(현대의 보통 한국인들)에게 선과 악이란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 의미 있는 단어는 오로지 ‘생존’뿐이다. 한 치 앞 모르고 사는 한국인에겐 '한 치 앞 모르는 드라마'가 맞다? ‘추노’의 이러한 인물 전개는 역대 한국 드라마의 인물 배정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간 우리 드라마들은 선한 주연과 악한 조역을 나눴고, 시청자들은 악역에 치를 떨면서 길거리에서 악역 배우를 만나면 ‘직접 응징’에 나서는 순진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한국 사회가 천천히 움직일 때는 이런 천진난만한 태도를 가질 만했고, 선인을 사랑하고 악인을 미워하면서, 현실에서는 처벌받지 않고 승승장구하는 악인이 드라마에서나마, 상상 속에서나마 처벌받는 데 ‘사필귀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간 숱한 악행을 현실에서 봐오면서, 그런 악행들이 처벌될 길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제 한국인도 ‘악의 가치’를 알았고 그래서 더욱 약아지고 있다. 그러면서 이제 배역의 성격이 뻔한 드라마는 점점 더 보기 힘들어지는 것 같다. 이러다 보니 과거에는 배우들이 악역을 기피했지만, 요즘은 “악역을 맡아야 인기를 끈다”며 배우들이 먼저 악역을 찾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인의 호흡은 가쁘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몇 달 전만 해도 한국 경제가 완전히 거덜나는 것처럼 붕괴론이 하루가 멀게 나오더니, 지금은 또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경제란다. 그러나 이 역시 또 모른다는 진단도 있다. 한국 정치인의 상당수가 ‘토건족’으로 분류되는 이 나라에서, 미분양 아파트의 폭증과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의 부실이라는 검은 구름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다. ‘한국처럼 살기 힘든 나라는 안에서는 지옥이지만 밖에서 보면 다이내믹해 보기 좋다’는 말도 있다. 외국에서 살아본 사람에게는 그대로 진실이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아니, 하루에도 시간대별로 이슈가 달라지면서 분위기가 획획 바뀌는 나라도 드물다. 최근 한국 드라마가 해외에서 인기를 끄는 배경에는 이렇게 숨가쁘게, 짐승처럼 살아가는 한국인의 현실이란 밑바탕이 있기에 가능한 측면도 있다. 드라마 ‘추노’의 또 다른 기여라면, 세상을 보는 시각(스펙트럼)을 넓혔다는 점도 있다. 과거 드라마가 궁중이라는 좁은 세계의 사랑 또는 암투, 현대 기업에서의 사랑다툼 정도만 다뤘다면, ‘추노’에서는 정치권의 암투부터 저자거리의 삥뜯기까지 인간사의 다양한 면모가 서로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줬다. 이렇게 스펙트럼을 넓혀줘야, 피곤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마약 같은 TV 드라마에 넋이 나가면서도 시청자가 한국 사회를 보는 시각이 그래도 좀 넓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소꿉장난은 이제 그만 하고 좀 더 넓게 세상을 보게 해주는 드라마가 나오길 ‘추노 이후 시대’에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