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태 편집국장 화제 작 드라마 <추노>를 보면 최소한 두 번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란 질문이다. 나무 베듯 사람을 죽이는 훈련원 장교 황철웅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품게 되고, 마지막 회에선 철웅 자신이 추노꾼 대길에게 묻는다. “도대체 나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고. 이 드라마를 만든 곽정환 PD는 인터뷰에서 이 질문에 스스로 대답했다. “어떻게든 상대를 죽이고 밟고 올라가서 이기고 싶은 황철웅의 마음은 끝없는 경쟁에 내몰리는 현대 도시인의 그것과 같지 않은가. 이 사람을 보면서 ‘무엇 때문에 죽이는 거지?’ ‘과연 그것 때문에 죽여야 할까?’까지 생각해주면 좋겠다.”(주간 <시사인> 인터뷰에서).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대드느냐는 질문에 대한 하층민 대길의 대답은 조금 다르다. 마지막 회에서 대길은 철웅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바꿔준다잖아! 이 지랄 같은 세상!” 이 두 대답은 한국 사회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대답이다. 즉, ‘내가 출세하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지배층의 대답이라면, ‘이 지랄 같은 세상 바꿔야 하잖아’는 변혁 추진 세력의 대답이다. 시청률이 30% 이상까지 올랐다는 ‘국민 드라마’에서 이 질문이 반복된다는 것은, 그만큼 이 질문이 현재 한국에서 보편적인 질문이라는 의미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들을 보면서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할까’라는 의문을 품게 될 때가 그만큼 많다는 소리가 된다. 이런 질문에 대해 사회학자 김동춘 교수(성공회대)는 나름 탁월한 대답을 내놓았다. 많은 한국인들이, 특히 지배층이 이 한반도를 ‘영원히 살 땅’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즉 ‘피난민 의식’으로 살기 때문에 극렬한 행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선진국에서라면 그리 심각하지 않을 저항의 몸짓에 대해 한국 지배층이 아주 극렬한 반응을 보이면서 저항 세력의 씨를 말리려는 태도를 김 교수는 이렇게 해석했다. 그래서 ‘왜 꼭 그랬어야 할까?’는 지극히 한국적인 질문이다. 대개 선진국에서는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극렬하게는 일이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저렇게까지 할까’라는 질문 안 드는 게 선진국 문제 많은 한국 사회지만, 그래도 전 국민이 합의하는 한 가지 사항은 있다. ‘굶어 죽지는 않는다’는 인식이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거의 모든 한국인의 절체절명 과제는 ‘굶어 죽지 않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인사말도 ‘진지 드셨어요?’가 됐겠는가. 굶어 죽지 않게 된 한국에서, 이제 한국인들은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남 위에 올라서기 위해 ‘안 그래도 되는’ 싸움을 처절하게 벌이고 있다. 먹는 내용은 달라도 최소한 굶어 죽지 않는 나라에서, 이제 싸움의 양상이 좀 달라질 때도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정도 재력을 쌓으면 스스로 만족하면서, 베풀면서, 봉사하고 나누는 기쁨을 느끼면서 사는, 이른바 ‘삶의 선진화’가 이뤄질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이다. 이렇게 ‘제 정신이 돌아오는’ 사회가 되려면 물론 먼저 지배층이 한 발 양보해야 한다. 재산과 권력을 축적할 만큼 축적한 지배층은 한 발 양보해도 지위나 재력에 아무런 문제도 없기 때문이다. 기어이 남을 밟고 올라서야겠다는 의식만 버리면 가능한 일이다. 황철웅이 몸으로, 그리고 입으로 들려준 질문이 더 이상 국민적 화제가 되지 않는 날, 한국은 어느덧 선진국이 돼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