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태 편집국장 KAIST 대학생의 연쇄 자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왜 우리 사회는 모든 제도를 ‘징벌적으로’ 운영하냐는 의문이다. KAIST도 성적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징벌적 등록금을 부과하는 개혁책을 시도하다가 애꿎은 젊은이들을 잃었다. 경쟁은 좋지만 징벌을 함부로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는 사례다. 전북대 신방과 강준만 교수는 최근 펴낸 ‘미국사 산책’에서 미국사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했다. “프론티어(변경 개척)의 역사”라는 것이다. 프론티어 정신이라고 하면 미국의 서부 개척사를 생각하지만, 강 교수의 주장은 좀 다르다. 신대륙으로 건너간 유럽인들은 우선 유럽 대륙의 낡은 관습과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넜다. 미국에 도착한 그들은 땅 위에서도 계속 서쪽으로 달렸다.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 서쪽 땅을 계속 빼앗는 과정이었다. 캘리포니아의 금광을 향해 달린 행렬이기도 했다. 사회적 갈등이 있을 때 ‘신천지’만 찾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경험을 여러 번 한 게 미국인들이다. 유럽에 문제가 있으면 신대륙으로 건너가면 되고, 동부 정착지에서 다툼이 생기면 서쪽 변경을 개척하면 되고, 아메리카 대륙이 좁으면 전 세계로 배를 타고 진출하면 되고, 그래도 안 되면 우주로 날아가고, 더 이상 현실세계에 갈 데가 없으면 가상현실의 세계로 들어가면 되고… 라는 식이다. 미국인들이 최근 열심히 개척하는 변경은 컴퓨터, 인터넷, 아이폰으로 대표되는 ‘가상 세계’다. 그래서 이제 미국을 싫어하는 사람도 미국 비판 글을 쓰려면 마이크로소프트나 애플의 ‘미제’ OS(운영체제)로 돌아가는 컴퓨터를 켜서, 글쓰기 프로그램을 돌리고, 다시 미국인이 개척한 인터넷을 통해 글을 보내고 들여다보고 해야 한다. 이제 아이폰 없으면 촌놈 취급받는 세상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새 변경을 개척하는 데 필요한 게 무엇인가? 왜 미국인들만 이렇게 새 변경을 잘 개척하나? 흔히 언급되는 게 ‘실패를 용인하는 사회’, 즉 영어로 ‘trial & error'를 허용하는 사회다. 미국에 살아보면 2번째 기회를 주는 여러 시스템에 놀랄 때가 있다. 돈 관리를 잘못해 파산 선고를 받아도 5년 정도 열심히만 살면 다시 은행에서 돈도 빌려 주고, 집도 살 수 있게 해 준다. 한번 실패하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낙인을 찍는 한국 시스템과 다르다. 미국에도 명문 대학이 있고 ‘미스터 하버드’는 한국의 명문대학 출신만큼 대접을 받지만, 그렇다고 ‘후진 대학’ 출신이 영원한 바보가 되지도 않는다. 제2, 제3의 성공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한편 trial & error를 거의 보장하지 않는 대표적인 사회로 한국, 일본이 꼽힌다. 인생의 출세 또는 성공을 18, 19세 때 치르는 단 한 차례의 시험으로 나눈다는 점에서 이런 특징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요즘 흔히 “한국엔 왜 스티브 잡스가 없냐”고들 한탄하지만, 한국은 그런 인물이 나올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실수해도 좋으니 한번 해봐”라고 기회를 줘야 잡스 같은 인물이 나온다. 한국 시스템에서 한번 실수하면? 바로 죽음이다. 그러니 1등 꽁무니를 따라가다가 후다닥 흉내내는 것만 발달한 게 한국 경제의 특징이다. 문제는 그런 기회도 이제 거의 없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잔인한 징벌 시스템’을 지금처럼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진심으로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