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의 진술 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었던 사건이었습니다. 특수한 소송을 제외하고는 청구를 하는 쪽(원고)에게 청구의 근거(청구원인)를 증명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원고가 이 부분을 증명하지 못하면 소송은 지게 됩니다. 남편은 부인의 외도 사실을 주장하면서 이혼을 청구하고 싶은데, 부인은 이에 대해 전면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재판은 상당히 진행됐고, 이제 마지막 재판(변론기일)이 예정돼 있었습니다. 남편 분이 이 사건을 저에게 상담해 왔을 때, 저는 사건을 맡지 않기로 결정하고 “현재로써는 증거가 너무 없어 소송에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정말 이혼 소송을 계속하셔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씀드렸고, 남편 분은 힘없는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갔습니다. 1시간이 지난 후, 남편 분이 저희 회사로 전화를 걸어 “변호사님, 사실 아내가 불륜을 저지른 증거가 있습니다. 증거가 있으면 소송을 맡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증거가 있다면 당연히 소송을 맡을 수 있습니다. 일단 회사로 증거를 가져와 주시죠.”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이 가져온 증거를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내의 불륜사실이 적나라하게 녹음된 MP3파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물어 보았습니다. “이거 정상적인 방법으로 녹음 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녹음 내용상 차에서 녹음된 것으로 보이는데, 도대체 어떻게 녹음 하셨나요? 녹음의 방법에 따라 처벌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제가 아내랑 차량을 같이 사용했는데, 차량에 설치된 블랙박스에 차량 내부의 소리를 녹음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가져온 녹음 파일은 블랙박스에 녹음된 파일입니다.” “혹시 이혼 소송을 위해 블랙박스를 설치하거나 녹음을 일부러 하신 것은 아닌가요?” “아닙니다. 저는 블랙박스를 만질 줄 몰랐는데, 우연히 살펴보니 녹음이 돼 있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녹음된 것이라고 판명되면 처벌을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이 녹음 파일을 증거로 사용할 수 있는지와 관련해서 담당 변호사들이 내부회의를 했습니다. 블랙박스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 몇 달 전 부터 녹음이 돼 왔고, 녹음 날짜와 이혼소송의 시기를 고려하면, 불법적인 방법으로 녹음된 것은 아니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녹음된 증거를 법원에 제출할 때는 ‘녹취록’이라는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녹취록은 전문 속기사에게 맡겨 그 분들이 녹음 파일을 듣고 글로 써서 문서로 만들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번 사건의 경우에는 녹취록과 함께 녹음된 MP3파일도 함께 제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의뢰인들은 종종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을 변호사에게 숨기고는 합니다. 저는 항상 ‘소송은 유리한 것을 얼마나 잘 주장하는 가도 중요하지만, 불리한 사실을 얼마나 잘 방어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사건의 이면에 있는 사실을 같이 알아가도록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아무리 불리한 사실을 잘 숨겨도 소송 중에는 이런 사실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혼소송의 마지막 변론기일(재판일)이 됐습니다. 그때까지 상황으로는 우리 쪽 패소가 거의 확실했기 때문에, 부인과 부인의 변호사는 상당히 고무된 표정이었습니다. 재판장이 “더 이상 제출할 증거가 없습니까?”라고 물었고, 상대방 변호사는 의기양양하게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먼저 증거를 늦게 제출해서 재판을 지연시킨 점에 대해 죄송합니다. 피고의 불륜사실이 담긴 녹취록과 MP3 파일을 증거로 제출하겠습니다. 가능하다면 MP3 파일을 이 법정에서 같이 청취해 봤으면 합니다.” 본래 마지막 변론기일에 새로운 증거를 제출하는 것은 상대방이나 법원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재판장이 증거신청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증거신청 기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증거라면 재판장이 증거신청을 받아 줍니다. 법정에서 MP3 파일을 듣고 나서 상대방은 하얗게 질려서, 재판장에게 재판을 한 번 더 해줄 것을 요청(기일을 속행한다는 표현을 씁니다)했는데, 재판장은 재판(변론기일)이 아닌 조정을 할 것을 명했습니다. 남편도 부인이 처벌 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원만히 이혼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조정은 원만히 이뤄졌습니다. 이처럼 녹음된 파일 하나가 재판의 결과를 완전히 뒤바꿀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스마트폰 등 각종 휴대용 전자기기가 보편화돼 언제 어느 장소에서도 손쉽게 녹음을 할 수 있습니다. 대화도중, 전화통화도중 등 아무 때라도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녹음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상대방 몰래 비밀리에 녹음한 자료도 법적 효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 상대방이 전화로 협박을 해오는데 녹음을 해도 처벌받지 않나요? - 남편의 불륜을 확인하고 싶은데, 차에 도청장치를 달면 안 될까요? - 조정위원이 편파적인데 녹음을 하면 안 될까요? - 법정에서 녹음을 해도 되나요? - 몰래 녹음한 MP3 파일을 법원에 증거로 제출해도 되나요? 요즘 들어서 상당히 많이 받는 질문입니다. 특히 최근에는 강남의 성형외과에서 환자가 수술 중 수술과정을 녹음 한 후에 이를 성추행의 증거로 제출해서 상당한 이슈가 됐습니다. 또한 스마트폰의 녹음 기능을 활용해 대화를 녹음을 한 후 이를 법원에 증거로 제출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녹음, 녹취, 감청, 녹화 등을 규제하는 법이 통신비밀보호법입니다. 통신비밀보호법은 누구든지 타인 간의 대화를 함부로 녹음 또는 청취할 수 없고, 이에 위반하여 수집한 녹음 자료 등은 재판이나 징계절차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통신비밀보호법 제3조, 제4조). 쉽게 말하면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하는 것이 처벌대상이고, 증거로 사용할 수 없는 녹음입니다. ‘타인 간’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따라 통신비밀보호법의 적용범위가 달라집니다. 만약 A라는 사람이 B와 C의 전화 통화 내용을 비밀리에 녹음하거나 청취한 것이라면, 이로 인해 수집한 증거는 법적 효력을 인정받을 수 없어서 재판에서 증거로 제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위의 A가 타인간의 대화 내용을 녹음한 것이 아니라, A 자신이 상대방 B와 대화하는 내용을 녹음 했다면, 이는 ‘타인 간’의 대화라고 볼 수 없어서 통신비밀보호법의 적용을 받지 않습니다. 녹음했다고 모두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2명이 대화한 것이 아니라 3명이 대화한 것을 녹음했다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일까요? 대법원은 3인 간의 대화에 있어서 그 중 한 사람이 그 대화를 녹음하는 경우에 다른 두 사람의 발언은 그 녹음자에 대한 관계에서 ‘타인 간의 대화’라고 할 수 없으므로, 이와 같은 녹음행위가 통신비밀보호법 제3조 제1항에 위배된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시해 이러한 비밀녹음을 증거로 쓸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2006도4981). 최근에 형사소송법을 개정해 공판정(형사 재판 법정)에서 심리 전부에 대한 속기, 녹음, 영상녹화를 의무화 하는 법률개정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대한변호사협회에서 법정녹음을 반대하는 의견을 제출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다시 의견을 수렴한 뒤 제출하겠다고 하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점점 사람을 믿지 못하는 사회가 돼 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계속 발전적인 논의를 필요로 합니다. 특히 사생활 보호와 인권보호의 관점에서 이러한 비밀 녹음을 대하는 법의 태도가 어떻게 변화될지 주목해야 할 시점입니다. - 고윤기 로펌고우 변호사 / 서울지방변호사회 사업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