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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필리핀] 세부 짓밟고 지나간 스페인·미·일 뭘 얻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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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89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6.06.27 09:37:28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1일차 (서울 → 세부)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세부

지난 밤 늦게 인천공항을 출발한 세부퍼시픽 항공기는 4시간 30분 비행 끝에 세부막탄국제공항에 새벽 2시에 도착했다. 세부는 인구 262만 명,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1521년 마젤란의 상륙으로 유럽인들이 필리핀 땅에 처음 발을 디딘 곳도 여기다.

멕시코와 필리핀, 중국을 연결하는 스페인의 삼각 무역로를 담당했던 갈레온(galleon) 선박도 마닐라로 옮겨가지 전까지는 여기로 드나들었다. 공항에는 오늘밤에도 서울, 부산 등에서 4~5편의 항공기들이 연이어 들어온다. 택시를 잡아타고 예약해 놓은 시내 호텔에 들어가 짧은 잠을 청한다.

현지 사람들은 이른 새벽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날이 더위지기 전에 볼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까닭에 열대지방의 아침은 분주하다. 그 인파에 섞여 나는 도시 탐방을 시작한다. 들쭉날쭉한 보도에 때로는 구정물이 고인 웅덩이를 피해 가면서 걷자니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생활오수가 처리 안 된 채 마구 흘러내리는 개천은 악취를 풍긴다. 필리핀 하수 처리율 10%라는 통계가 이러한 현실을 뒷받침한다.

세부의 역사를 간직한 수그보 박물관

수그보 박물관(Sugbo Museum)은 감옥이 있던 자리에 들어섰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비 오듯 흐르는 땀을 식혀준다. 세부의 고고학, 역사, 민속을 소개한 으뜸 박물관이다.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답게 고고학 발굴 유물 중에는 송, 원, 명나라 시절부터 이곳에 드나들었던 중국 상인들이 싣고 온 도자기가 많다.

1521년 마젤란의 세부 해안 상륙으로 시작된 유럽인들과의 만남은 세부, 아니 필리핀 역사의 핵심이다. 마젤란은 이웃 섬 막탄을 다스리러 갔다가 현지 부족장 라푸라푸와 전투에서 사망하고, 마젤란 선단은 본국으로 돌아가 세부에 사나운 사람들이 산다고 세계에 알린다. 

마젤란 사망 44년이 지난 1565년 드디어 스페인은 멕시코에 있던 레가스피(Legazpi)를 군대와 함께 보내 와 세부를 점령함으로써 스페인의 필리핀 통치가 시작된다. 그러나 필리핀은 열강 침략자들에게 마냥 당하지만은 않았음을 박물관은 강조한다. 1898년 미서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결과 어느 날 갑자기 지배자가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1942년부터 3년간은 미국에서 일본으로 바뀌는 동안 이어졌던 현지인들의 저항에 대한 기록이 눈에 띈다.

▲독립공원 내 레가스피 동상. 마젤란 사망 44년이 지난 1565년 스페인은 멕시코에 있던 레가스피를 군대와 함께 보내 와 세부를 점령했다. 하지만 필리핀이 마냥 당하지 않고 저항했음을 수그보 박물관은 강조한다. 사진 = 김현주

전쟁 승리로 얻는 것은 없다

수그보 박물관을 나와 독립광장(Plaza Independencia)으로 향한다. 광장에는 레가스피의 동상과 기념비가 있고, 한켠에는 일본인 전몰자 위령비가 서 있다. 위령비에는 ‘전쟁 승리로 얻는 것은 없다’고 적혀 있다.

하얀 건물이 우아한 세부 메트로폴리탄 성당을 지나 세부유산기념비(Heritage of Cebu Monument)에 닿는다. 마젤란에서 현대까지 세부 역사를 묘사한 서사적 입체 조형물이다. 기념비 뒤에는 작은 교회당 샌 후안 바우티스타 채플(San Juan Bautista Chapel)이 숨길 듯 모습을 드러낸다. 오락가락 가는 비가 내리니 콜로니얼 건축물로 이어지는 세부 올드타운은 비감한 분위기에 젖는다.

구제품 상점이 즐비한 시내

시내 상점가로 돌아와 오늘 오전 어디선가 잃어버린 모자를 사려고 가게들을 기웃거린다. 거리에는 구제품 상점들이 즐비하다. 그것도 버젓이 시내 한복판 목 좋은 곳에 말이다. 한국 동네 구석구석 의류 수거함을 통해 모은 물건들이 여기에서 꽤 괜찮은 물건으로 둔갑해서 팔려 나간다. 잃어버린 내 모자도 언젠가 이곳으로 흘러들어올 것이다. 

어깨 가방에 허술하게 걸려있던 모자는 금세 소매치기의 표적이 됐을 것이다. 필리핀 소매치기는 솜씨가 날렵하기도 소문났다. 어린이들을 데려다가 훈련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몸이 빠르고 손이 작은 어린이들은 소매치기에 제격이고 잡히더라도 미성년자라서 훈방되기 때문이다.

▲독립공원에 일본인 전몰자 위령비가 서 있다. 위령비에는 ‘전쟁 승리로 얻는 것은 없다’고 적혀 있다. 사진 = 김현주

▲시내 한복판 목 좋은 곳에 구제품 상점들이 즐비하다. 한국 동네 구석구석 의류 수거함을 통해 모은 물건들이 여기에서 꽤 괜찮은 물건으로 둔갑해서 팔려 나간다. 사진 = 김현주

필리핀 가톨릭의 상징 아기예수 산토니뇨

드디어 아까 지나친 산토니뇨 성당(Basilica Menor del Santo Niño)에 닿았다. 성당은 순례객과 관광객들이 섞여 혼잡하다. 성당 안쪽 마당 건너편에는 세계순례자센터가 있고 마침 세부에서는 세계성체대회(IEC, International Eucharistic Congress)가 열려 더욱 그렇다. 

화려한 성당 내부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성당 한 켠 작은 채플 안 방탄유리 상자에 보관된 아기 예수 산토니뇨다. 마젤란이 세부에 첫 발을 디디면서 세부왕 후마본과 왕비에게 세례명을 주고 선물했다는 산토니뇨는 44년 후 레가스피의 침공으로 잿더미가 된 세부에서 기적적으로 온전하게 발견된 이후 필리핀 가톨릭 신앙의 상징이 됐다. 

▲산토니뇨 성당이 보인다. 순례객과 관광객들로 붐빈다. 성당 안쪽 마당 건너편에는 세계순례자센터가 있다. 사진 = 김현주

▲산토니뇨 성당 한켠 작은 채플 안 방탄유리 상자에 보관된 아기 예수 산토니뇨. 필리핀 가톨릭 신앙의 상징이다. 사진 = 김현주

성당 앞 광장 팔각형 채플 안에 보존돼 있는 마젤란 십자가도 세부의 명소다. 500년 전 세부에 당도한 마젤란이 심었던 바로 그 자리에 건재하다지만 일부 사학자는 진품이 아닐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산페드로 요새(Fort San Pedro)를 마지막으로 찾아 세부 탐방을 마친다.


2일차 (세부 → 마닐라 환승 → 브루나이행 출발)

외국 귀빈으로 혼선 빚은 공항

세부에서 국내선으로 마닐라로 가서 브루나이(Brunei)행 국제선으로 갈아타는 것이 오늘 일정의 전부인 만큼 여유롭게 공항으로 나간다. 국제선 항공기 일정 때문에 마닐라 공항에서 무려 5시간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여유로워서 어떻게 지루함을 달랠까 염려했는데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의 인생처럼 여행에는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새삼 일깨우는 사건 때문이다. 마닐라로 떠날 에어 아시아(Air Asia) 여객기가 출발 지연을 거듭한 끝에 예정보다 4시간 30분 늦게 떠나게 된 것이다. 기장은 “외국 귀빈 방문으로 마닐라 공항이 폐쇄됐기 때문에 세부 도착이 늦어졌다고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니 궁금증은 더할 뿐이다. 

▲산토니뇨 성당 앞 광장 팔각형 채플 안에 보존된 마젤란 십자가도 세부의 명소다. 일부 사학자는 진품이 아닐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진 = 김현주

▲하얀 건물이 우아한 세부 메트로폴리탄 성당. 사진 = 김현주

나중에 알게 됐지만 외국 귀빈은 다름 아닌 일본 아키히토 천황이었다. 필리핀 아키노 대통령이 직접 공항에서 극진히 영접하고 배웅했을 만큼 중요한 손님이었으니 공항 전체가 폐쇄됐을 법도 하다. 일본 천황은 아시아 각 지역을 돌면서 전몰자 위로와 함께 선린 외교를 하러 다니는 것이다. 마침 난샤(南沙)군도 분쟁으로 필리핀이 중국과 소홀해진 틈을 일본이 뚫고 들어온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 히로히토 천황이 저지른 전쟁에 대한 속죄의 마음을 담은 방문이니 뭐라 할 수 없지만 문제는 나의 항공기 연결이다. 

뒤늦게 마닐라 공항에 도착하니 당초 5시간 30분의 넉넉한 환승 연결 시간이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초조한 가운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한 지점과 다음 지점을 연결하며 이어나가는 내 여정의 특성상 한 곳이 끊어지면 여행 자체가 무너지므로 여행 전체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어 보였다. 마닐라 공항에는 4개의 터미널이 있는데 서로 꽤 떨어져 있어서 터미널 간 이동은 버스나 택시로 해야 하는 여건이라서 더욱 그렇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공항 직원에게 물어보니 국제선 체크인 카운터는 출발 45분 전까지 오픈한다며 어서 가보라고 한다. 남이 잡아놓은 택시를 양해를 구해 빼앗아 타고 기사를 재촉해 미친 듯 달려 세부항공 체크인 카운터에 당도하니 막 마감하려는 순간이다. 보딩패스를 받고 이민국과 검색대를 통과해 항공기에 간신히 탑승하니 이제야 목이 타들어온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곱씹는 순간이다. 

(정리 = 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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