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푼타 아레나스] 남미 땅끝에 서니 태평양이 왜 화평인지 알겠네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18일차 (토레스델파이네 국립공원)
토레스델파이네를 향해
아침 7시 30분, 토레스델파이네행 버스에 오른다. 토레스까지는 140km. 멀리 구름에 갇힌 토레스의 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원래는 토레스델파이네 국립공원 서부 지역 호수와 빙하를 탐방하려고 숙소까지 예약했으나, 공원 서부 지역은 마침 산불로 출입 통제다.
다행히 공원 동부 지역은 방문객에게 일부 개방됐다. 토레스가 가까워지자 만년설 덮인 산들이 위용을 뽐낸다. 광활한 초원에는 양떼가 한가로이 노닌다. 미국 서부 대평원에 버금가는 넓은 대지를 달려 국립공원에 들어서니 내 몸을 날릴 듯 바람이 거세게 불어댄다.
비싼 공원입장료(1만 5000칠레 페소, 한화 3만 3000원)를 내고 공원 내 셔틀버스를 갈아타고 10여분 이동해 등산 입구에 닿는다. 시시각각 보는 방향에 따라 토레스가 다른 색깔과 모습을 드러낸다. 대륙은 순순히 끝나지 않았다. 바다를 불과 얼마 앞둔 여기에 이렇게 장엄한 비경을 만들어냈다. 메마른 산이지만 작은 물들이 모여 큰 계류를 만들어 콸콸 흐른다. 날씨가 변덕을 부리니 어제 대여한 등산장비가 쓸모를 발휘한다.
신비로운 토레스
가파른 마지막 한 시간을 오르니 토레스 전망대(Mirador del Torres)다. 등산을 시작한 지 4시간 30분, 거리 9km, 해발고도 886m까지 왔다. 거대한 자연을 외경하며 토레스(towers라는 뜻)의 세 봉우리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북봉, 중봉, 남봉 세 봉우리 높이가 2300m부터 2850m까지다. 지금 내가 있는 지점에서 위로 1400m부터 2000m을 더 솟아 있는 거대한 세 개의 바위산이다.
▲토레스델파이네로 가는 길. 저 멀리 산봉우리가 보인다. 사진 = 김현주
그동안 내가 봤던 거대한 바위산들을 기억해 본다. 그러나 서울 북한산 백운대도, 설악산 울산바위도, 미국 와이오밍 주에 있는 데블스타워도,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 엘카피탄도 토레스의 높이와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힘들여 끝까지 올라오길 참 잘했다. 토레스의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래로는 산중 호수가 보인다. 천지 같기도 하고 백록담 같기도 하다.
토레스를 뒤로 하고 버스 타는 곳까지 돌아간다. 갈 때는 이를 악물고 해냈으나 9km를 돌아갈 생각을 하니 까마득하다. 무사히 하산을 마치고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돌아오니 밤 10시다. 길고 힘들었던 하루가 지나갔다.
19일차 (푸에르토 나탈레스 → 푼타 아레나스)
푼타 아레나스로 돌아가다
오전 10시 버스를 타고 푼타 아레나스로 돌아간다. 푸에르토 나탈레스…. 이름처럼 예쁘고 왠지 애절한 것 같은 도시를 떠난다. 푼타 아레나스까지 세 시간, 버스는 만석이다. 지독한 옆바람에 대형 버스가 휘청거린다. 이틀 전 묵었던 호스텔을 찾아가니 주인아주머니가 반긴다.
▲토레스의 봉우리들은 신비롭다. 서울 북한산 백운대도, 설악산 울산바위도, 미국 와이오밍 주에 있는 데블스타워도 토레스의 높이와 규모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사진 = 김현주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은 게 인상적인 푸에르토 나탈레스 해변. 사진 = 김현주
펭귄 서식지 가는 길
오후에 오트와이 펭귄 서식지로 가는 미니버스 안에서 스위스 노부부를 만나 얘기를 나눈다. 낯선 언어로 대화하기에 물어보니 스위스 취리히(Zurich) 지역에서 사용하는 독일어 방언이란다. 한국에도 4주 여행해 본 베테랑이다. 부산, 김치 이런 것들을 생생히 기억하며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고 한다.
펭귄 서식지는 공항을 지나 좀 더 가다가 비포장도로로 갈라져 38km를 더 들어가야 한다. 전혀 손을 대지 않은 채 철망 울타리로 경계 표시만 해 놓은 광야는 끝이 없다.
▲이름처럼 예쁘고 왠지 애절할 것 같은 도시 푸에르토 나탈레스를 떠나 푼타 아레나스로 갔다. 사진 = 김현주
펭귄 울음소리 서글픈 마젤란 해협
푼타 아레나스 출발 1시간 15분 걸려 펭귄 서식지에 도착하니 척박한 기후와 강풍에 견디느라 납작 엎드린 이끼와 각종 툰드라 식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오늘 펭귄 수백 마리는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미 짝짓기가 끝난 시즌이라서 펭귄이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다. 암수 한 쌍에서 한두 마리 부화하는 펭귄은 회귀성이 있어서 자기가 태어난 곳에 반드시 돌아온다. 가족애가 두터운 펭귄에게 1~2월은 갓 태어난 아기 펭귄들의 털갈이가 끝난 후 걸음마 연습하는 시기이다. 아기 펭귄이 아장아장 걷는 모습이 몹시 귀엽다.
▲‘태평’하지 않은 바다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이곳 펭귄들의 울음소리는 왠지 서글프다. 참혹한 환경이라 그런 걸까? 사진 = 김현주
그런데 펭귄 울음소리가 왠지 서글프게 들린다.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 때문에 귀여운 동물인 줄 알았는데 목청을 돋우어 한참 만에 한 번씩 울어대는 허스키한 목소리가 구슬프다. 펭귄 서식지 앞 바다는 마젤란 해협이다. 대서양과 태평양 두 큰 바다가 만나는 곳은 거칠고 험하다. 마젤란이 이 험한 바다를 빠져 나가 만난 바다를 퍼시픽(Pacific), 즉 고요한 바다라고 불렀던 사정을 이해할 만하다. 이렇게 참혹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펭귄의 울음소리는 그래서 슬프단 말인가?
단단한 현대 중고 미니버스
십 수 년 된 현대자동차 그레이스 미니버스는 15인승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자갈이 마구 튀어 올라 차 바닥을 때리는 험한 비포장 길을 너끈히 달려 시내에 다시 데려다 준다. 석양을 맞으며 호텔로 돌아오는 기분이 야릇하다. 푼타 아레나스여 안녕. 언제 다시 이 지구 끝 변방 도시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다시 찾아올 기약을 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먼 남미의 도시들은 떠날 때마다 마지막인 것 같아서 이렇게 비감하다.
(정리 = 김금영 기자)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