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라이프 싸이클'에 기반한 르노의 콘셉트카 시리즈. (사진=르노)
CNB저널은 지난 호에서 우리나라 중형 세단 시장에 새바람을 일으킨 르노삼성 SM6와 한국지엠(GM) 쉐보레 올 뉴 말리부의 디자인에 관해 살펴봤다. 이번 주엔 SM6, 즉 탈리스만의 새로운 디자인을 이끌어낸 주역들을 통해 2010년대 르노와 르노삼성의 새로운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한다. 이 기사를 시작으로 앞으로 전세계 주요 자동차 메이커의 주요 디자이너를 소개하는 연중 시리즈를 시작한다.
▲로렌스 반 덴 애커 르노 디자인 총괄 부회장. (사진=르노)
로렌스 반 덴 애커: 르노 디자인 총괄 부회장
세계적 자동차 메이커 중 상대적으로 약세로 평가받았던 프랑스 르노는 새로운 디자인 정책을 확립하고 알려나가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에 적합한 인물로 떠오른 게 동서양에서 두루 경험을 쌓은 로렌스 반 덴 애커였다. 새로운 도전에 목말라 하던 반 덴 애커 역시 이러한 르노의 목표에 적극 호응해 2008년 르노의 디자인 총괄 겸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반 덴 애커는 네덜란드의 델프트 공과대학교에서의 산업디자인 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90년 이탈리아 토리노의 ‘디자인시스템’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1993년 아우디 외장 디자인팀에 합류하면서 디자이너로서의 본격적인 삶을 시작했다. 1998년에는 포드에 스카우트 되어 포드의 브랜드 이미징 담당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러다가 2003년 포드 이스케이프 플랫폼 디자인을 총괄한 후 그의 디자인 역량을 인정받게 되었고, 불과 2년 뒤인 2005년에 포드의 전략 디자인담당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다. 디자이너로서 출세할 만큼 출세했다고 여길 만도 했지만 그는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려고 했다. 2006년, 자신을 키워준 포드를 과감히 떠나 일본 마츠다로 옮긴 그는, 2008년 르노에 정착했다.
라이프 사이클을 반영한 콘셉트카 시리즈
반 덴 애커가 합류한 르노의 새로운 디자인 아이덴티티는 세 가지 키워드를 바탕으로 새롭게 정립되었다. 단순함, 감각, 그리고 따뜻함이었다. 이 디자인 아이덴티티는 인간의 삶의 주기(라이프 사이클)라는 아이디어에 바탕을 둔다. 라이프 사이클이란 사랑에 빠지고, 여행을 떠나고, 가정을 꾸리고, 일에 몰두하고, 여가를 즐기고, 점차 현명해지는 과정을 말한다. 반 덴 애커는 디자인에 대한 이런 감성적인 접근을 통해 르노의 문화와 열정을 전달하고자 했다.
반 덴 애커는 라이프 사이클에 맞춘 여섯 대의 콘셉트카를 쉴 새 없이 선보였다. 그 첫 작품은 2010년 드지르(DeZir)라는 스포츠 콘셉트카였다. 이어 나온 CUV 콘셉트 캡처(Captur)는 2013년 상용화되자마자 빠르게 유럽의 베스트셀링 크로스오버가 되었고, 국내에도 QM3라는 이름으로 들어와 르노삼성의 보수적인 이미지를 타파하는 데 기여했다. 또 SUV R-스페이스(R-Space), 100% 전기 상용차 프렌지(Frenzy) 등의 콘셉트카를 연달아 공개한 데 이어 트윈런(Twin'Run), 이니셜 파리(Initiale Paris)로 이어졌다.
바쁘게 콘셉트카를 내보내면서 한편으로는 르노의 새로운 플래그십이 될 탈리스만(국내명 SM6)을 기획했다. 탈리스만은 소형차와 경차의 강자인 르노의 가장 상위 모델이다. 2010년의 1세대 탈리스만은 르노삼성의 준대형 차량인 SM7이었다. 회사의 간판이어야 할 최상급 모델인 1세대 탈리스만이 시장에서 별 호응을 얻지 못하자 르노는 모든 것을 갈아엎었다. 그리고 새 탈리스만 프로젝트의 기획은 2011년부터 즉시 시작되었다.
동서양 망라 디자인팀, ‘가장 아름다운 차’ 만들어내
르노는 유럽과 아시아 시장 구별 없이 보편적으로 인정받을만한 D세단을 만들기로 했다. 그래서 초기 프로젝트 이름도 '글로벌 디(Global D)'였다. 이를 위해 반 덴 애커는 세계 각지의 르노의 디자인 인력을 총동원했다. 각 지역의 디자인 본부별로 미션만 부여한 것이 아니라 아예 디자이너들을 한 데 모았다.
안소니 로 르노 외관 디자인 총괄 부사장(홍콩인), 르노디자인아시아의 크리스토퍼 듀퐁 상무(프랑스인), 그리고 한국의 성주완 르노디자인아시아 수석디자이너 등을 비롯해 수십 명의 프로젝트 팀을 아예 프랑스에 1년간 체류시키며, 본사에서 자신과 함께 탈리스만에만 매달리게 했다.
반 덴 애커와 르노의 디자인 드림팀이 추구한 것은 ‘세계 모든 시장에서 글로벌한 경쟁력을 갖춘 단 하나의 익스테리어/인테리어 디자인’이었다. 기존의 르노 이미지도 완전히 벗어나기로 했다. 탈리스만은 이처럼 르노의 최상위 모델다운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탈리스만은 유럽 시장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지만 디자인은 성공적이었다. 올해 1월 프랑스 파리에서 국제자동차페스티벌(FAI) 주최로 열린 ‘2016 컨셉트카 전시회’ 전야제에서 온라인 투표 중 40%의 득표율을 얻으며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차’ 부문에 선정된 것이다. 2위였던 ‘재규어 F-페이스’(25.1%)와는 15% 포인트나 차이나는 뛰어난 결과였다.
반 덴 애커 또한 2015년 르노에서 내놓은 뉴 에스파스(QM7), 카자흐(Kadjar), 탈리스만, 뉴 메간(Megane) 등의 디자인을 총괄한 성과로 이 페스티벌에서 디자인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로렌스 반 덴 애커 르노 디자인 총괄 부회장(왼쪽)과 트윈Z(Twin'Z) 콘셉트카. (사진=르노)
르노, 두 번째 라이프 사이클 시작
지난 8년간 반 덴 애커가 주도한 르노의 콘셉트카들은 한 차례의 라이프 사이클을 끝마쳤다. 그리고 반 덴 애커는 2016년부터 새로운 라이프 사이클에 들어간다고 밝히고, 르노의 다음 세대 모델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반 덴 애커는 자동차 디자인 전문 매체인 ‘카디자인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르노는 우리 콘셉트카의 라이프 사이클에서 영감을 얻은 양산차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2015년까지 여러 콘셉트카를 쉴 새 없이 내놓은 과정에 대해 “그 과정은 하나의 멋진 스토리였고, 덕분에 르노의 모든 사람들이 진심으로 집중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런 면이 르노의 진실한 가치라고 느낀다. 따라서 난 그만두지 않고 새로운 콘셉트카 시리즈를 내놓으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디자이너가 헤드라이트 모양을 쓱싹 스케치만 하면 되는 시절은 지나갔다”며 “디자이너는 신기술과 관계된 전문성을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신기술이 있으면 그 공급업체와 친밀해져야 하고 엔지니어들과도 가깝게 지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을 일상적으로 해야 한다”며, “우리가 더 멋진 휠, 더 멋진 라이트 시그니처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동료 모델러, 디자이너 및 엔지니어들 모두가 팀을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안소니 로 르노 외관디자인 총괄 부사장. (사진=르노)
안소니 로: 르노 외관 디자인 총괄 부사장
안소니 로는 홍콩 폴리테크닉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영국 왕립 예술학교(RCA: Royal College of Art)에서 자동차디자인 석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로터스(Lotus) 자동차, 아우디 등을 거쳐 일본 메르세데스-벤츠에 스카우트되어 F200과 마이바흐 콘셉트카들을 디자인했다. 2000년부터는 사브(Saab)의 선행디자인 수석디자이너로 일했고, 2004년에는 유럽 GM의 선행디자인 수석으로 승진해 사브와 오펠(Opel), 복스홀(Vauxhall) 등을 모두 총괄했다.
르노에는 2010년에 외관 디자인 총괄 부사장으로 합류했다. 당시 반 덴 애커가 주도한 르노의 디자인 전략인 ‘라이프 사이클’의 개념을 개발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안소니 로였다. 이에 따라 2010년부터 2013년까지 드지르, 캡처, R스페이스, 프렌지, 트윈지(Twin'Z), 트윈런, 이니셜 파리 등 콘셉트카 시리즈의 외형이 그의 주도 하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클리오, 캡처(QM3), 트윙고, 에스파스(QM7), 카자흐, 크위드(Kwid), 탈리스만(SM6), 그리고 메간 등의 양산차를 내놓았다.
탈리스만에서 최상의 비율을 찾다
안소니 로는 '카디자인뉴스'와의 인터뷰에서 “2010년의 르노는 하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백지와도 같았다”고 표현했다. 기존의 브랜드 이미지, 디자인 전통 등에 얽매이지 않고 무엇이든 새롭고 다른 것을 추구하겠다는 르노의 가능성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 여섯 대의 콘셉트 카를 만들어 내고, 5년 만에 6종의 신차를 론칭하는 것은 대단한 경험이었다. 그는 “지난 5년을 매우 밀도 있고 역동적으로 보냈다. 라인업 전체를 새롭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고 밝혔다.
SM6, 즉 탈리스만의 외형 디자인에 대해서 안소니 로는 ‘다이내믹 앤 카리스마(Dynamic and Charismatic)’가 핵심 키워드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 구현하는 것이 쉽지 않은 목표였다. 이는 디자이너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회사가 디자인의 기초를 얼마나 잘 갖추고 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안소니 로가 탈리스만의 다이내믹하고 카리스마 있는 외형 디자인을 위해 가장 공들인 부분은 바로 이 ‘디자인의 기초’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르노의 디자이너들은 3박스 타입 중형세단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비율을 찾아냈다.
탈리스만의 휠베이스는 SM5보다 50mm 더 길어져 준대형 모델인 SM7과 같아졌다. 전폭은 10mm 넓어졌는데, 이는 국내 중형차들 중 가장 길다. 반면 프론트 오버행(앞바퀴보다 튀어나온 부분)은 매우 짧게 만들어서 오히려 전체 길이는 동급에서 가장 짧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휠베이스가 더 길어 보이는 효과를 봤다. 전고도 동급 경쟁차량보다 낮아졌다. 여기에 18~19인치의 커다란 휠을 적용했다. 낮아진 무게중심으로 균형과 안정감이 커졌고, 카리스마 넘치는 역동적인 비율을 갖춰 한 눈에 시선을 사로잡을 조형적 특징을 갖추게 되었고, 르노의 최상위 모델다운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었다.
“구매 가능한 가격에 고급차 경험 추구.
독일차에 없는 프랑스 감성을 개발”
안소니 로는 “슈퍼카 같은 주문생산 차를 만드는 것은 르노의 일이 아니다. 그런 것은 고급차 제조업체들이 하는 일”이라며 르노 자동차 디자인의 현실적인 면에 대해 설명했다. “디자인은 전략이다. 각 단계의 트림에 어떤 새로운 접근법을 적용할지의 문제”라며 “우린 구매 가능한 가격대에서 새로운 기술과 좋은 디자인을 제안하고 싶은 것”이라고 그는 밝혔다.
“고객이 BMW의 1, 2 시리즈나 벤츠 A, B 클래스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도 이해하고 있으며, 그런 고급 요소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고객이 실제로 구매하는 차는 그보다 덜 갖춰진 것이다. 고객이 4만 5천 유로에 에스파스를 산다면 그 에스파스는 모든 옵션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포르쉐 911이라면 8만 5천 유로를 내고도 LED 헤드라이트가 빠져 있을 것이다”라고 르노의 전략을 설명했다.
르노 디자인만의 차별성에 대해서는 “우리는 프랑스 차인 만큼 매력 있고 탐나는 브랜드가 되고 싶다”며 “첫 번째 트림에서의 비주얼 포인트를 예로 들자면, 휠이나 뱃지, 라이트, 그리고 시트 등받이의 컬러 그라데이션 등은 독일 차에서는 보기 힘든 프랑스적인 것들이다. 우린 그런 것을 계속 개발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또한, “재능 있는 디자이너들은 르노랑 일하고 싶어 한다”며 르노 디자인 팀의 강점을 자랑했다. “이유가 뭐겠나? 우리 디자이너들은 어떤 프로젝트에서든 일할 기회를 똑같이 가진다. 내부 경쟁을 거치면 누구나 차세대 캡처나 파리 콘셉트카에 참여할 수 있다”며 직위보다 실력에 따라 기회를 부여하는 공평한 시스템을 자랑했다.
이어 그는 “우리는 멋진 장소들에서 일한다. 파리 본부 외에도 상파울로, 부카레스트, 뭄바이, 베이징, 서울에 디자인 스튜디오들이 있고 덕분에 우린 매우 개방적”이라며 “특정 디자인 전략에 고착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하면 같은 스타일로 스케치할 필요가 없다. 우린 젊은 디자이너들의 새롭고 다른 재능을 보고 싶다”며 자유롭고 혁신적인 디자인을 추구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관련기사
윤지원 yune.jiw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