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문규상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 재판은 사실관계를 먼저 확정한 다음 확정된 사실관계를 토대로 법률을 해석하고 적용하여 결론을 내리는 작업입니다. 복잡한 법률을 현실의 구체적인 사실에 적용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실관계를 실체적 진실에 부합되도록 밝히는 것이 실제로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재판은 증거를 중심으로 사실관계를 확정하기 때문에 수많은 증거 중에서 증거의 가치를 어떻게 판단하는지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고 자칫하면 당사자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도 합니다.
민사재판에는 원고와 피고의 양쪽 당사자가 있고, 형사재판의 경우에도 피고인과 피해자의 양쪽 당사자가 있으므로 재판을 할 때 양쪽 당사자의 주장과 변명을 귀담아 듣고 그에 부합하는 각종 증거의 가치를 자세히 살펴서 그 당부 또는 시비를 가려야 할 것입니다.
수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필자가 주니어 검사 시절 고소 사건을 수사하면서 처음 고소인의 진술을 들었을 때에는 피고소인이 천하에 없는 나쁜 사람으로 여겨졌다가 피고소인의 조사를 거친 후에는 다시 고소인이 피고소인을 무고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든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처럼 고소인과 피고소인의 주장과 변명을 증거와 관련시켜 꼼꼼히 챙겨 나가는 과정에서 사실관계가 점점 실체적 진실에 부합되어 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물론 실체에 부합하는 명백한 물적 증거가 있다면 쉽게 사실관계를 확정할 수 있겠지만 물적 증거의 가치가 훼손되었다든지, 인적 증거 밖에 없는 경우라면 참고인이나 증인과 양쪽 당사자 사이의 친소 관계, 이해득실 관계 등에 비추어 진술의 신빙성 여부를 엄격하게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참고인이나 증인의 숫자에 실체적 진실이 묻혀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검사나 법관은 양쪽 당사자의 주장과 변명을 선입견 없이 똑같은 비중으로 잘 듣는 것이 급선무일 것입니다. 끝까지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사람 중에는 정말 억울한 사람이 있을 확률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귀가 2개인 이유는 양쪽 당사자의 말을 똑 같이 잘 들어보라는 의미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만약 나타나지도 않은 호랑이를 보았다는 사람이 1명, 2명을 넘어 3명 이상이 되면 이를 뒤집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三人成虎).
공자는 논어 위령공(衛靈公) 편에서 ‘많은 사람이 싫어해도 반드시 좋은 점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하고, 많은 사람이 좋아해도 반드시 나쁜 점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衆惡之 必察焉 衆好之 必察焉)’라고 말씀하셨는데, 다산 정약용은 이를 “많은 사람의 미움이 있어도 외로이 충성을 다하는 사람(고충/孤忠)일 수도 있고, 많은 사람이 좋아하더라도 실제로는 향원(鄕愿, 사이비 군자)일 수도 있으므로 부화뇌동(附和雷同)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라고 풀이하셨습니다.
판결은 ‘여론몰이’로부터도 독립해야
논어의 위 구절은 수사나 재판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것입니다. 수사의 주체인 검사와 재판의 주체인 법관은 사건에 대한 여론몰이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출범과 동시에 의욕적으로 시작되었던 ‘갑질 사건’에 대한 수사와 재판 결과 ‘갑질’ 부분에 대한 몸통은 대부분 유야무야되거나 무죄선고 되고 개인비리 부분만 기소되었거나 유죄선고 되었다고 보도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헌법 제103조(“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의 ‘사법권의 독립’, ‘법관의 독립’에는 ‘여론으로부터의 독립’도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법관의 독립은 법의 지배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며 법의 지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법관은 다수의 여론, 다수결의 논리에도 간섭받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눈 앞의 명리(名利)에 급급하여 ‘태산명동 서일필(泰山鳴動 鼠一匹)’격의 여론몰이 수사가 되거나 여론에 부화뇌동하여 본분을 잃어버린 재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0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법언(法諺)이 더욱 되새겨지는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