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몬타뇰라 = 이상면 CNB저널 편집위원(연극영화학 박사)) 많은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1877~1962년)에게 몬타뇰라(Montanola)는 특별한 곳이다. 헤세는 독일 남서부 칼브(Calw)에서 출생하여 청년 시절을 보낸 후 가이엔호펜(Gaienhofen)에서 7년 거주하다가, 1919년(42세) 스위스 남부의 산동네 마을 몬타뇰라에 와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43년간 생애 후반부를 보냈고, 여기에 묻혔다. 헤세가 단지 여기서 오래 살았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이곳에서 가장 큰 결실의 황금기를 보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올해는 그가 몬타뇰라로 옮긴 지 100년이 되는 해. 그래서 현지 기념관에서는 특강/낭송 등 여러 행사가 열리는 중이다. 필자는 헤세의 몬타뇰라 입주 100년을 맞아 현지를 방문했다.
헤세의 몬타뇰라 시대(1919~1962년)
헤세는 제1차 대전이 끝나갈 1917년 무렵 가족 문제와 부인의 정신질환 등을 겪으며 매우 힘든 시기를 보냈다. 또한 평화주의를 고백한 이후 독일 언론으로부터 비난을 받아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심리 문제를 치료하기 위해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구스타브 융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던 때에 헤세는 42세 되던 1919년 몬타뇰라로 와서 빛나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의 주요 저작들이 이곳에서 출간되고 창작되었고(<데미안>, <나르시스와 골트문트>, <싯다르타>, <황야의 이리> 등), 또 그의 산뜻한 그림들이 대부분 여기서 그려졌다. 그가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시작한 수채화와 드로잉은 바로 이 산동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그린 것들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몬타뇰라에 와서 살다가 헤세는 세 번째이자 가장 오래 함께 산 부인 니논 돌빈을 만나 정신적 안정을 얻었다. 또 그를 이해하며 대화를 나누고 와인을 함께 마시며 어울리는 예술 친구들(Kunstfreunde)도 만났다. 그의 작품을 읽고 좋아했던 젊은 독일 화가 귄터 뵈메(Günter Böhmer)가 이사 와서 아주 가까이에 살면서 헤세의 초상화와 작품들에 삽화를 그려주었다. 반전사상과 평화주의로 인해 독일과 멀어지고, 독일인들을 멀리하고 지냈던 헤세는 여기서 새로운 삶을 살며, 문학과 미술에 전념했던 것이다. 그래서 몬타뇰라는 그가 ‘선택한 고향’(Wahlheimat)이다.
이렇게 헤세가 가장 풍성한 결실을 맺은 곳이어서 그런지, 헤세의 세 군데 기념관(칼브, 가이엔호펜, 몬타뇰라) 중 여기 몬타뇰라 기념관에 더 많은 소장품이 있고, 특히 헤세의 그림은 주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방문객들도 이리로 많이 온다.
몬타뇰라로 가는 길
학부에서 독문학을 전공한 필자는 헤세를 가까이 알고자 몬타뇰라를 꼭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잘 오지 않았다. 더구나 몬타뇰라는 스위스 남쪽의 작은 곳이어서 교통편이 쉽지 않다. 지난 8월 필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고속열차(ICE)를 타고 스위스 바젤-취리히를 거쳐 루가노(Lugano)에 도착한 후, 버스를 타고 갔는데, 하루 종일 걸렸다. 취리히 역에서 2시간 정도 기다려서 환승해야 했기에, 루가노 역까지 8시간 정도 걸렸다.
여기까지 오면 거의 다 온 셈인데, 이태리어 사용 지역인 루가노는 테신 주(Kanton Tessin, 이태리어로는 티치노/Ticino)의 중심 도시로서, 알프스 산들 사이에 있는 거대한 루가노 호수를 끼고 있다. 중앙역 바깥으로 나오자 보이는 높은 산과 거대한 호수의 풍광이 대단하다. 잠시 보다가 중앙역 근처에서 콜리나 도로(Collina d’oro)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10여 분 후 버스는 도시를 벗어나 산으로 올라간다. 창문에서 청량하고 시원한 바람이 반겨준다. 버스는 이태리 풍의 작은 집들이 모여 있는 좁다란 골목길을 휘어져가며 계속 올라간다. 산 언덕으로 더 올라가니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창밖을 내다보니 큰 산들 사이 또다시 거대한 호수가 보였다가 사라진다. 엄청난 풍경이다 ― 헤세는 이런 산과 호수가 있는 마을에서 살았구나.
몬타뇰라 공립도서관에서 하차하여 2분만 걸어가면 헤세 기념관(Museo Hermann Hesse)이다. 삼각형 지붕이 있는 자그마한 건물 벽 우측에는 헤세 사진이 걸려있고, 문 좌우 옆에는 큰 나무의 잎들이 무성하다. 입구 앞에는 원형 테이블에 안내 팸플릿들이 놓여있다.
아치형 문 안으로 들어가니 곧바로 헤세 책들과 그림을 파는 기념품점이고, 안쪽 작은 공간의 책상 위에는 방명록이 있다. 기록을 슬쩍 거슬러 살펴보니, 한국 방문객들의 인사말과 서명이 자주 눈에 띤다. 독어로 대화한 기념품점 여직원은 “한국인들이 많이 온다”며, 한국인이 어떻게 헤세를 알고, 왜 좋아하는지 오히려 내게 물어본다.
이 작은 로비 공간의 벽은 자주색으로 따뜻한 느낌을 주는데, 앞의 복도와 좁은 계단을 쳐다보니 온화한 느낌이 이어진다. 이런 공간 모습은 소박하면서 단아하여 헤세 박물관으로서 맘에 든다. 나는 멀리서 힘들게 찾아온 만큼 기념관 자료들을 찬찬히 다 볼 생각을 하고 1층 복도 전시물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1층 좁고 기다란 복도의 양옆 벽은 헤세의 간략한 생애를 보여준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제법 넓은 전시실이 나온다. 바깥으로 초록 나뭇잎들이 싱그럽게 보이는 큰 아치형 창문을 중심으로 앞에는 헤세의 타자기가 놓인 책상이, 옆 벽에는 초판본 책들·사진 자료들, 또 헤세가 그린 그림들이 걸려있다. 나는 삐거덕거리는 낡은 나무 바닥을 밟으며 책장과 유리장 안에 있는 자료들을 들여다보았다. 옛날 출판본들을 보면, 반전(反戰)-평화주의자인 헤세의 작품들은 어려웠던 나치 시대인 1930~40년대에도 계속 출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헤세의 작품들은 나치 시대에도 ‘금서’는 아니었다.
벽에는 헤세의 수채화와 드로잉들도 걸려있고, 유리장 안에는 헤세의 편지들, 그림 도구들도 있다. 헤세는 여기 몬타뇰라에 와서 정신적 치유(힐링)를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연필과 펜 드로잉·수채화들이다. 대부분 그림들은 크기가 작은데, 엽서나 편지에 그림을 그려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이렇게 직접 그림을 보니, 동화적(童畵的)인 그의 그림들에서 따스함과 자연친화적인 감정이 잘 느껴진다. 벽에는 좀더 큰 그림들이 걸려있다. 헤세는 이 동네 주변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앉아서 그림을 그린 듯하다. 산들 사이 루가노 호수 풍경과 주황색 기와 지붕이 있는 이태리 풍의 주택들, 언덕과 길옆의 야자수 나무들과 빨간 백일홍 꽃들이 알록달록 정겹게 그려져있다. 아마도 이렇게 정감어리고 순수함이 깃든 그림과 시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헤세를 좋아하는 것 같다.
헤세와 동양사상, 그리고 크눌프
3층에 올라가니, 작은 공간은 ‘헤세와 동양’으로 헤세와 인도·동양철학의 연관을 보여준다. 헤세는 1911년 인도와 스리랑카·버마·인도네시아로 1년간 여행을 갔다. 그가 불교 사상에 영향받은 것은 알겠지만, 설명판에 보니 중국 철학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즉, 도교 사상과 주역 등에 영향받았다고 한다. 20세기 초반 헤세는 참으로 넓게 열린 생각을 가진 서양 작가였다.
그 옆 다락방에서는 헤세와 친교가 있었던 50년대 서독 대통령 테오도르 호이스(Theodor Heuss)에 관한 기획 전시가 열리고 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 정치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이던 시절에 이미 헤세와 친분이 있었다는데, 흥미롭게도 전시물들 중에는 그의 그림들도 있다.
마지막 공간으로 지하실(지층)에 내려가면 20석 정도 좌석의 작은 비디오실이 있다. 여기서 헤세에 관한 기록영화 등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은 할아버지가 된 헤세의 아들들과의 인터뷰를 모은 필름이 상영되고 있다. 헤세에 관한 영상 자료들로는 텔레비전 방송이 헤세의 생애와 작품, 가족 및 주변 지인들과의 인터뷰 등을 담은 것이 있고, 또 그의 작품이 영화화된 것도 있다고 한다.
필름을 한동안 보다가 덥고 답답해서 나와 작은 정원으로 들어가 쉬다보니, 마당에서 거북이가 천천히 왔다 갔다 한다. 헤세의 소설 <크눌프>(Knulp)에서 이름을 따와 ‘크눌프’라고 불리는 거북이란다. 이것은 느림이다. 세상을 느리게 따라가는 생물들의 상징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