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오늘 겸재 그림을 찾아 나서는 길은 우천(牛川)이다. 경교명승첩 속 그림(그림 1)인데 영조 17년(1741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겸재의 여느 한강변 그림처럼 배를 타고 지나면서 그린 것으로 보인다. 강가에는 어부의 배로 여겨지는 작은 배 한 척이 보이고 거리를 두고 강가에 초가집 몇 채가 보인다. 자세히 보면 오른쪽 집 울타리 밖에 어떤 이가 길을 오르고 있다. 그 위쪽으로는 이 그림의 중심이 되는 위치에 솟을대문이 우뚝한 규모 있는 한옥(그림 속 2 표시)이 자리 잡고 강으로 내려오는 아래쪽으로는 누정(樓亭)으로 보이는 건물이 보인다.
또한 이 한옥의 좌측 산등성이(1 표시)에는 또 하나 누정처럼 보이는 기와집이 자리 잡고 있다. 주변 산은 우뚝하고 강은 수려하다. 어디를 그린 그림일까? 답은 제목에 있다. 즉 우천(牛川) 주변을 그린 그림이다. 우천은 경기도 광주와 용인을 지나는 경안천의 옛 이름이다. 우리 지명으로는 소내, 쇠내였는데 한자로 써서 우천(牛川), 소천(苕川)이라 표기하였다.
그 시절 우천(소내)은 단순히 경안천에 한정되지 않고 이 하천이 흘러나오는 한강도 포함하는 지명이었다. 따라서 이곳에 있던 한강나루 이름은 소내나루(우천나루)였다. 어떤 이의 설명으로는 이 지역 물가에서 자라는 질긴 풀인 쇠(치기)풀(牛鞭草)이 무성하여 쇠(소)내가 되었다 한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그림에서 4가 바로 우천(경안천)이다. 그 옆은 산으로 이어졌는데 산 사이 안부로 이어지는 고개가 망조고개다. 필자가 점선과 화살표로 고갯길을 표시해 놓았다. 겸재는 달리 고갯길을 그리지 않았지만 그 시절에도 고갯길은 있었을 것이다. 번호 2로 표시한 한옥을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지금의 분원초등학교가 자리 잡은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 건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부 연구자들은 이 그림을 그린 해가 1741년이고 사옹원 분원이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이 1752년인데 아직 옮겨오지도 않은 분원을 어떻게 그릴 수 있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필자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다. 더구나 필자가 찍은 사진 1에서 보듯이 분원초등학교는 산의 능선길을 오른 곳에 있고, 분원 가마터는 다시 학교 뒤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겸재 그림 속 한옥은 망조고개에서 내려온 평지에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겸재의 그림으로 보면 필자가 1로 표시한 능선길 작은 한옥 부근이 분원 가마터에 가까울 것 같다. 2로 표시한 큰 한옥은 지금의 남종면 농협 뒤 육리골 평탄지 주택들이 자리 잡은 위치로 보인다.
지도 1은 현재의 분원리 주변 상세 지도이다. 지도 속 번호 1은 분원초등학교와 가마터이다. 물론 산등성이에 자리 잡고 있다. 번호 2는 육리골 평탄지로 망조고개에서 넘어오는 길 안쪽 주택지이다. 번호 3은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소내섬 방향으로, 겸재가 그림을 그린 관점(觀點, view point) 방향이다. 번호 4는 우천이며, 5는 분원리로 넘어오는 망조고개다.
겸재의 그림과 이 지도를 비교해 보면 좋을 것이다. 또 하나 비교 자료는 사진 2로, 겸재의 관점에서 분원을 바라본 사진이다. 겸재의 그림, 지도, 최근의 사진을 비교하여 독자 여러분께서 판단해 보면 좋을 것이다.
왜 북쪽 끝 땅이 ‘남종(남쪽 끝)’ 됐을까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로 출발한다. 참 이상도 하지. 광주군 최북단에 있는 면(面)을 왜 남쪽 끝 남종면(南終面)이라 했을까? 그 답을 찾아 옛 지도에 발을 들여 놓아 보자. 옛 지도 2는 지금의 양평 지역을 그린 양근(陽根) 지도다. 참고로 양평(陽平)은 양근(陽根)과 지평(砥平)을 통합한 후 붙인 지명이다. 위 양근 지도를 보면 한강 남쪽 양근 땅에 남시(南始), 남중(南中), 남종(南終)이란 지명이 보인다.
지금 개념으로 보면 강으로 경계를 삼으면 행정단위로 관리하기 편했을 텐데 무슨 까닭으로 강 건너 고을들을 광주에 포함하지 않고 양근에 포함해 둔 것일까? 고려나 조선으로 돌아가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운송수단은 철도나 자동차가 주를 이루지만 고려나 조선 때는 도로도 부실하고 운송수단도 부실하여 가장 좋은 운송수단은 강과 바다를 이용하는 수운(水運)이었다. 더우기 한강은 남한강과 북한강에서 소출되는 물산의 가장 큰 수송로였으며 사람들의 이동로였다. 많은 조운선(漕運船)과 뗏목이 이 길을 지나갔다.
광주에서 이 강가로 나오려면 산줄기를 넘어야 했다. 무갑산(582m), 관산(555m)에 이어 앵자봉(670m), 양자산(710m)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벅찼을 것이다. 분원초 뒤로 이어지는 금봉산(233m)도 일상으로 넘나들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양근의 남종면은 광주로 이관되었다. 옛 이름을 그대로 가진 채로. 그러다 보니 광주 최북단 남종면(南終面)이 되었다.
이제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출발이다. 분원리는 대중교통이 많이 불편한 지역이다. 필자는 걷기를 즐기다 보니 배낭 하나 덜렁 메고 출발했다. 동서울 터미널에 가면 퇴촌을 경유하는 13-2번 버스가 있다. 또 하나는 여주행 전철로, 경기광주역에서 버스로 환승하여 퇴촌으로 가는 방법이 있다. 광주역 1번 출구에서 퇴촌행 버스도 있지만, 보통 인내심으로는 버스 타기가 어려우니 일단 축협 앞까지 와서 환승하실 것. 운이 좋으면 수청리 행 버스로 분원리까지 올 수도 있지만 축협 앞에서 환승하실 것. 38, 38-8, 38-83, 38-84 버스가 있는데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면 좋다. 퇴촌사거리에 오면 다시 분원리, 수청리 행 버스로 환승한다. 38-2, 38-21, 38-22, 38-23, 38-24, 38-26, 38-52 버스가 있는데 인내가 필요하다. 겸재의 다음 그림을 찾아가는 길에 수청리까지 가야 하므로 잘 숙지해 놓도록 권해드린다. 필자는 다른 생각이 있어 분원리까지 걸어 갔는데, 가는 길에 금사리까지 들러 2시간쯤 걸렸다.
이제 퇴촌에서 분원을 향하여 걸음을 옮긴다. 무더운 여름 고행의 길이다. 퇴촌사거리 낚지볶음밥 한 그릇 하며 주인 아주머니께 분원행 버스 시간을 물으니 버스가 자주 없다며 태워주시겠다 한다. 얻어 타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지만 오늘은 걷기로 했기에 참는다. 다산 선생을 생각하며 걷기로 했다.
걷는 이 없어도 정감 넘치는 강마을 길
다산(茶山) 선생은 분원 강 건너 마재 아래 소내(苕川)에서 자랐다. 젊은 시절 이곳 한강(열수, 洌水)에서 뱃놀이도 하고 소내나루 건너 천진암과 주어사(走魚寺)로 형님들과 함께 공부하러 다녔다. 권철신, 이벽, 김원성, 권상학, 이용억, 이승훙, 다산 형제 이런 이들이 함께 한 강학회였다. 이때의 감회가 다산의 소천사시사(苕川四時詞)와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에 수십 편 남아 있다.
다산은 어느 길로 해서 주어사와 천진암에 갔을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도 소내나루 건너 분원 지나 퇴촌 지나고 관음리를 통해 앵자봉 남북에 있는 주어사와 천진암을 다녔을 것이다. 오늘은 다산을 생각하며 이 길을 걸어 보는 것이다, 천진소요집에 실린 다산의 시 한 편 읽고 가자. 이런 더운 날에는 가을을 미리 당겨 피서하면서.
天眞菴賞楓: 천진암 단풍 감상
買酒花郞坊裏 : 화랑방에서 술을 사서
停車鶯子峰陰 : 앵자봉 뒤에서 수레 멈추니
一夜纖纖白雨 : 하룻밤 가는 가을비에
雨厓欇欇紅林 : 양 절벽 온통 불타는 숲
소내에 관련된 시도 한 편 읽는다. 서울 생활 하다가 잠시 동부인하여(부인을 데리고) 소내로 왔을 때 쓴 시이다.
夏日還苕川: 여름에 소내로 돌아오다
長夏愁城邑: 긴 여름 도성에서 시름하다가
扁舟返水鄕: 조각배로 물 고을 돌아왔다네
村稀成遠眺: 드문 촌가 먼 경치 바라다보니
林茂有餘涼: 우거진 숲 서늘함 충만하구나
衣帶從吾懶: 의관은 게을러서 내버려두고
詩書閱舊藏: 시서는 전일의 것 읽어 본다네
行休苦未定: 진퇴를 아무래도 정하지 못해
生理問漁郞: 사는 이치 어부에게 물어야겠군
사실 퇴촌에서 분원까지 걷는 이는 거의 없다. 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차길 양편으로 자전거 전용길을 만들어 놓아 보도는 없어도 위험은 없다. 필자는 직진했지만 가는 길 곳곳 강마을도 내려가 보면 좋을 듯하다. 가는 길에 거쳐간 오리(梧里)는 정감이 있다. 마을 안내판에 이 마을에 사는 이들이 누구인지 적어 놓았다. 산골댁, 미옥네, 돌담집, 혜림네….
이렇게 해서 금사리 입구에 닿는다. 마을 입구에는 달항아리 모양의 조형물을 세우고 금사리 구터(金沙里 舊터)라 써 놓았다. 옛 도자기를 굽던 터란 뜻이다. 조선은 궁(宮)과 관(官)에서 쓸 도자기를 주로 광주(廣州), 양근(陽根) 일원에서 구워 공급했는데 이 일을 맡은 기관이 사옹원(司饔院)이었다. 1467년 시작하여 1883년 문을 닫을 때까지 거의 광주 전 지역을 이동하면서 340여 곳에 가마를 운영했다고 한다. 불을 땔 나무를 찾아 옮겨 다닌 것이다. 지금의 분원리로 옮기기 전 마지막 10여 년을 이곳 금사리에서 사옹원 분원을 운영했다고 한다. 조선 최고의 달항아리는 이곳 금사리 생산품이라 하니 기대를 가지고 마을 안까지 둘러 본다. 주민들 말로는 남아 있는 가마의 흔적은 없다고 한다. 도자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산기슭과 밭도랑을 다니며 자기편(조각)을 찾아 옛 향기를 느끼곤 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망조 고개 넘으면서 느끼는 도자기의 추억
이제 망조고개를 오른다. 고개 너머가 분원리이다. 금사리 이후 국가 도자기 제작소(燔造所)가 문을 닫을 때까지 1752년에서 1883년까지 130여 년간 도자기를 굽던 마을이다. 땔감 문제, 원료 흙의 문제, 운송의 편리성을 고려하여 소내나루 옆으로 분원을 옮겼다. 승정원일기 곳곳에 “우천가로 옮기겠다”고 주청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아래는 인용문이다.
분원이 우천변에 자리 잡은 뒤 새로운 땔감 조달 방안은 세금 징수였다. 뗏목 형태로 흘러들어오는 목재 값어치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를 일종의 통행세로 받아 필요한 땔감의 상당 부분을 사서 쓰도록 한 것이다. 분원리에는 수세 징수소도 설치됐다. 자연히 강원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도성 주변으로 재목을 실어 나르던 뱃사공과 목재 상인들의 반발도 거셌다. 1891년 뱃사공의 조직인 선도중(船都中)이 수세 혁파를 요구하는 방을 우천에 내걸고 수백 명이 분원 공방을 에워싸고 시위를 벌여 세 사람이 옥에 갇혔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백자를 만드는 중요한 재료의 하나인 백토의 공급도 원활해졌다. 광주 지역의 백토는 철분이 들어있어 색깔이 좋은 백자를 만들기 어려웠다. 따라서 분원은 초기부터 다른 지역에서 흙을 실어 와야 했다. 17세기에는 강원도 원주 백토를 썼다는 기록이 있는데, 무겁디무거운 흙을 마소를 이용하여 먼 거리를 운반한다는 것은 매우 힘겨운 일이었다. 조선 후기가 되면 백토는 강원도의 원주와 양구, 경상도의 경주·진주·곤양·하동, 평안도의 선천, 경기도의 가평과 이천, 충청도의 서산·충주·음성, 황해도 봉산 것이 다양하게 쓰였다. 뱃길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겸재 그림으로 돌아와 그림 속 그 집은 무슨 건물일까? 끝내 찾을 길이 없다. 영조 연간(1724~1776) 발행한 보물 1591호 해동지도에는 이쯤 되는 위치에 흥해사(興海寺)를 그려 놓았다. 그런데 겸재의 그림을 보면 절 건물은 아니다. 아마도 어느 세도가의 향리(鄕里) 집이든지, 승정원 일기 숙종-영조 연간에 번소(燔所: 가마를 비롯한 제조창)을 양근 우천강가(지금의 분원리)로 옮길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 받았으니 관리 주체(사옹원 분원)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번소는 옮겨졌을지도 모르겠다. 이 번소와 관련된 건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숙종 44년 무술(1718) 8월 19일(을미)
사옹원에서 번소를 옮겨 설치하는 등의 일을 청하니 세자가 허락하다
사옹원(司饔院)에서 번소(燔所)를 양근군(楊根郡) 우천(牛川) 강가로 옮겨서 설치하도록 청하였다. 인하여 본원(本院)의 시장(柴場)과 세미(稅米)를 갈라서 분원(分院)에 소속시키되, 절반은 시목(柴木)을 바꾸어 번역(燔役)을 돕도록 하고 절반은 공장(工匠)의 급료(給料)로 지급하며, 공장이 받는 여정포(餘丁布)는 본원에서 받아들여 사용하도록 해서 운반하는 노고를 없애도록 청하니, 세자(世子)가 이를 허락하였다.
司饔院請移設燔所於楊根郡 牛川江上. 仍以本院柴場, 稅米, 割屬分院, 一半貿取柴木, 以資燔役, 一半充工匠料給, 而工匠所受餘丁布, 自本院捧用, 以除運輸之勞, 世子許之.
이제 도자기를 굽던 가마터로 올라간다. 분원초등학교 뒤 언덕에 백자자료관이 자리잡았다. 이화여대에서 가마를 발굴하고 자료들을 모아 정리한 곳이다. 조선 백자에 대한 많은 자료가 정리 전시되고 있다. 유튜브 교육 내용도 있으니 꼭 보라고 도슨트 선생이 신신당부한다. 앞마당에는 19기의 선정비가 서 있다. 주로 번조관(燔造官)과 사옹원도제조(司饔院都提調)의 선정비들이다.
자료관을 돌아 내려오면 남종면 공설운동장이 있는데 그 옆 공터에는 마음 애틋하게 하는 조형물이 있다. ‘호수 속 마을 이야기’를 담은 조형물이다. 분원을 번영되게 했던 소내나루와 그 마을(우천리)은 1972년 팔당댐이 건설되면서 60 여 호 300여 명 주민의 고향은 물속으로 사라졌다. 아랫소내, 윗소내로 번성하면서 근교 채소 농업의 큰손들이었다 하는데 이제는 물새만 사는 소내섬으로 남았다. 물론 겸재 그림 속 물가에 있던 집들의 옛터도 수몰되었다.
팔당댐 물이 덮어버린 그림 속 집터들
소내강 뒤로 해가 저물어 간다. 소내섬은 고요하다. 도자기도 채소 농업도 없는 분원은 이제 붕어찜과 민물매운탕의 고장이 되었다. 오늘은 민물매운탕이다. 필자가 가는 집은 좀 허름한 집인데 주인장 말씀대로 자연산 물고기라서 그런지 애들 때 먹던 맛이다. 매운탕과 한 잔으로 행복해지는 날이다. 신흠의 아들 낙전당(樂全堂) 신익성의 시(詩) 한 수 읽으며 소내길을 마무리한다.
우천야음을 차운하다: 次牛川夜吟 (1618, 광해군 10년 8월 보름에 숙부와 함께 배를 타고 소양강으로 돌아 들어갔다)
客自牛川起: 나그네 우천에서 출발하는데
江從月峽穿: 강은 달빛 따라 협곡을 뚫었구나
生涯隨落葉: 평생 낙엽 따르니
鬢髮惜流年: 희끗한 머리는 가는 세월 아쉬워하네
霽日傷心麗: 개인 날은 슬프도록 아름답고
秋光滿目姸: 가을 풍경은 눈 가득히 어여쁘네
翛然成小飮: 어느새 소박한 술상 내오니
一醉任欹顚: 한 번 취해 삐딱해 볼거나
(다음 호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