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1호 김응구⁄ 2023.02.03 13:27:06
교토삼굴(狡免三窟). 영리한 토끼는 숨을 수 있는 세 개의 굴을 파놓는다. 지혜롭게 준비해두면 어려운 일을 면한다는 의미다. 흔히 대기업 총수나 정치인들이 새해를 시작할 때 고르는 사자성어다.
어려운 건 누구나 똑같다. 올 한 해 국내 주류업계라고 다르지 않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기회다. 타인의 적신호가 내겐 청신호라는 얘기가 아니라, 모두 힘들 때 스스로 기회를 만드는 쪽이 꽤 유리하다는 말이다. 준비성 있는 영리한 마케터라면 세상을 내 편으로 만들 세 가지 묘수 정도는 이미 만들어놓고 계묘년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십이지(十二支)’는 훌륭한 마케팅 도구다. 그래서 흔히 쓰인다. 열두 번 중 한 번은 내게 아주 좋은 기회가 된다. 주류업계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마침, 올해가 그 정점이다.
뉴요커가 한국 설화 ‘달토끼’에 꽂혀 만든 증류식소주
한국의 애주가들에게 ‘토끼소주’(Tōkki Soju)는 제법 잘 알려진 술이다. 그 이름처럼 라벨에는 뜀박질하는 토끼가 그려져 있다. 세상에 선보인 지 8년가량 됐지만, 토끼해여선지 올해 들어 더욱 부각(浮刻)하는 모양새다.
토끼소주를 만든 이는 미국인 브랜든 힐(Brandon Hill)이다. 그의 이력과 배경이 재밌다. 한국에 오기 전 미국에서 3년간 밴드 생활을 했다. ‘빈센트’에서 베이스를 맡았다. 텍사스에선 바텐더 생활도 했다. 그런 만큼 술을 많이 봤고, 또 많이 안다.
브랜든 집안은 양조가(釀造家)다. 미국 금주법(禁酒法) 시대에 할아버지가 위스키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술과 가까워졌다. 음주가 가능한 열아홉이 되자 직접 양조에 뛰어들었다. 뉴욕 브루클린의 밴 브런트 증류소에서 마스터 디스틸러(master distiller)로 근무하기도 했다.
브랜든은 지난 2010년 10월 처음 한국땅을 밟았다. 서울의 한 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는데, 당시 막걸리를 처음 접했다. “이 술이 어느 카테고리(酒種)에 들어가야 하는지 몰랐고, 특히 막걸리잔 같은 건 정말 재밌었다. 그런 경험들이 내겐 무척 신기했다.” 이후 틈나는 대로 전국의 양조장을 찾아다니며 한국술을 마음껏 즐겼다. 그때 방문한 양조장만 스무여 곳이다.
브랜든은 서울의 한 전통주 전문 교육기관에서 한국술을 배웠다. 급기야 2011년에는 증류식소주 제법까지 익혔다. 그해 한국을 떠나 뉴욕 브루클린에 정착했다. 당시 뉴욕에선 한식(韓食)이 인기를 끌었다. 그즈음 ‘미쉐린’에 고급 한식 레스토랑이 선정되자 그 인기는 더욱 가속화됐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한국술이라곤 희석식소주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많은 레스토랑이 한식과 와인을 마리아주(marriage)로 선택했다.
어느날 브랜든은 오픈을 앞둔 한식 레스토랑으로부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한국의 전통소주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렇게 2016년 ‘토끼소주 화이트’가 세상으로 나왔다. 출시 후에는 서서히 입소문을 타며 현지 한인사회와 SNS(사회관계망서비스)로 그 인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두 번째 아이템으로 ‘토끼소주 블랙’을 출시했다. 이후 2019년에는 아예 충북 충주에 증류소를 차렸고, 2020년 들어 여기서 생산한 토끼소주를 국내에 유통하기 시작했다. 2021년에는 토끼소주 골드와 토끼소주의 양주 브랜드인 ‘선비 진’과 ‘선비 보드카’도 새로 론칭했다.
브랜드 이름이 왜 ‘토끼소주’일까. 브랜든이 한국술을 배웠던 2011년이 바로 토끼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딱 12년 전이다. 브랜든은 토끼가 자신의 한국 경험을 잘 반영하는 상징으로 생각했다. 달나라에 토끼가 살고 있다는 한국 설화도 작명에 영향을 미쳤다. 엠블럼에는 토끼 주위로 건곤감리(乾坤坎離)도 그려져 있다. 그렇듯 한국에 대한 브랜든의 애정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라벨이나 엠블럼의 토끼 그림도 브랜든이 직접 그렸다. 과거 그래픽 아티스트로 활동했던 경험을 살렸다. 재주꾼이 아닐 수 없다.
병 뒷면 라벨에는 ‘달과 함께 마신다면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지극히 동양적인 문구를 써넣었다. 그 밑에는 그보다 작은 글씨로 ‘토끼소주는 한국 소주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2016년 뉴욕에서 설립되었습니다. 전통 소주 제조법에 현대 증류기술을 접목하여 고급 재료의 맛을 담았습니다.’라고 적혀있다. 누가 봐도 자부심 가득한 표현이다. 한국술에 대한 애정이 그 자부심을 만들었을 테다.
앞서 말했듯 토끼소주는 화이트와 블랙, 그리고 골드 세 가지다. 찹쌀 100%에 누룩과 물로만 만든다. 첨가물이나 감미료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화이트는 알코올도수 23도에 375㎖ 용량이다. 옅은 바닐라 향과 은은한 허브 향이 특징이다. 쌀 함량은 약 800g. 블랙은 40도에 375㎖와 750㎖ 두 가지다. 찹쌀 풍미에 달콤한 과일 향도 복합적으로 느낄 수 있다. 쌀 함량은 약 3㎏. 골드는 46도에 375㎖와 750㎖ 두 가지 용량이다. 쌀 함량은 약 3.5㎏. 미국산 버진 오크통(virgin cask)에서 숙성시킨다. 버진 오크통은 다른 술을 한 번도 담지 않은 오크통을 말한다.
브랜든은 토끼소주를 두고 개봉하자마자 마시는 첫맛도 좋지만 실온에 보관한 다음 마시는 두 번째 맛이 더욱 부드럽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함께하기 좋은 요리로 장어구이와 맑은 탕을 권했다.
편의점 세븐일레븐은 토끼소주를 지난해 5월 24일부터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와인과 수제맥주에 이어 편의점발(發) 프리미엄 증류식소주 경쟁에 더욱 불을 지폈다.
걱정하며 내뱉은 아내의 한마디가 버번위스키 이름으로
한국에 토끼소주가 있다면 미국엔 버번위스키 ‘래빗 홀(Rabbit Hole)’이 있다. 국내에는 페르노리카코리아가 지난해 여름 선보였다.
카베 자마니안(Kaveh Zamanian)은 잘 나가는 심리학자였다. 그의 아내 헤더는 켄터키주 루이빌(Louisville) 출신답게 버번위스키 애호가였다. 카베 역시 헤더 덕분에 버번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이후 버번위스키에 더 깊숙이 빠져든 카베는 금주법 시대 이후 대부분의 버번위스키 증류소가 획일화된 레시피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를 바꾸고 싶어 했다.
마침내 2012년 레빗홀 증류소를 설립했다. 버번위스키를 누구보다 사랑한 헤더였지만 카베의 이 결정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성공한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양조자가 되려 하다니….” 걱정이 심했다. 참다못한 헤더는 어느 날 카베에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토끼굴로 나를 데려가려 하나요(down the rabbit hole)”라고 쏘아붙였다.
카베는 헤더의 근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술 더 떠 그의 말에서 ‘래빗 홀’을 가져와 브랜드 이름으로 만들었다. 그리곤 자신만의 버번위스키 제법에 더욱 몰두한 끝에 래빗 홀만의 고유한 곡물 배합 비율을 개발했고 독창적인 레시피를 만들어냈다.
페르노리카코리아가 국내에 선보인 제품은 ‘래빗 홀 케이브힐(rabbit hole cavehill)’이다. 주재료인 옥수수(70%), 맥아밀(10%), 맥아보리(10%)에 달콤한 베이커리 풍미를 지닌 꿀 맥아보리(honey malted barley·10%)를 더했다. 래빗 홀의 시그니처 버번위스키다.
래빗 홀은 15개의 오크통 원액을 블렌딩해 만든다. 무슨 수가 있어도 15개를 넘지 않는다. 15개 오크통 원액 모두 직접 맛보고 고르기 때문에 제품 퀄리티가 높다는 게 페르노리카코리아 측 설명이다. 대량 생산하는 버번위스키는 많을 땐 수백 개의 오크통 원액을 사용한다.
또 하나는 오크통의 토스팅(toasting) 방식이다. 버번위스키는 오크통 안쪽을 태운 후 원액을 숙성시킨다. 법령으로 정해져 있다. 많은 증류소는 생산 효율을 높이고자 강한 화력으로 빠르게 태워 시간을 절감한다. 하지만 래빗 홀은 낮은 온도에서 서서히 굽는다. 그러면 오크나무 내 다양한 성분을 끌어내 더욱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페르노리카코리아는 ‘흑(黑)토끼’해인 올해 토끼 관련 브랜드와 협업한 특별 패키지를 가정의 달인 5월에 선보일 예정이다.
매년 선보이는 띠 마케팅, 올해는 신동엽과 함께한 ‘福토끼’
‘칭따오’를 수입·유통하는 비어케이는 매년 그해의 띠(동물)로 재밌는 마케팅을 펼친다. 칭따오가 추구하는 ‘펀(fun)’을 위해 각 띠를 유쾌하고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일러스트로 만들어낸다. 반응이 좋아 올해까지 여섯 차례째 선보이고 있다.
비어케이는 새해에 앞서 지난해 12월 중순 칭따오 ‘복맥’ 에디션을 출시했다. 복맥은 ‘복(福)을 부르는 맥주’라는 뜻이다. 이번 복맥은 계묘년을 기념한 ‘복(福)토끼’다. 제품 외관에는 자신감 넘치고 끼 많은 복토끼를 그려 넣었다. 칭따오 광고모델인 방송인 신동엽이 직접 작화(作畫)에 참여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에디션은 칭따오 알루미늄 병(472㎖) 두 개와 미니 잔(180㎖) 두 개로 구성됐다. 병뿐만 아니라 미니 잔에도 복토끼 일러스트를 그려 넣었다. 더불어 칭따오 로고와 ‘신나게 살아요!’라는 신동엽의 메시지도 쓰여있다.
비어케이는 지난달 16일 계묘년을 기념한 ‘달토끼’ 리미티드 에디션 캔도 출시했다. 전설 속 절구 찧는 달토끼를 모던하고 심플한 디자인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복(福)이라는 글자와 달토끼를 함께 새겨넣어 새해의 번창과 풍요의 메시지를 표현하고 싶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알코올도수는 기존 4.7도에서 0.3도 높인 5.0도다. 리미티드 에디션 500㎖ 캔 여섯 개와 미니 잔 두 개로 구성한 패키지도 한정 판매한다.
비어케이 관계자는 “올해의 동물 토끼를 활용해 칭따오표 새해 특별 에디션을 선보였다”며 “모두가 좋아할 만한 패키지와 구성으로 준비한 만큼, 소중한 분들과 칭따오 달토끼 리미티드 에디션 캔을 나누며 즐겁게 한 해를 시작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칭따오 복맥 에디션은 2018년부터 해마다 각 분야 아티스트와 협업한 일러스트를 선보이고 있다. 2018년에는 최미경 민화(民畵) 작가와 협업한 ‘황금개’, 2019년에는 이동윤 토이오일 작가와 함께한 ‘황금돼지’, 2020년에는 웹툰 주호민 작가와 손잡은 ‘흰쥐’를 선보였다. 2021년에는 예능인 장도연과 ‘흰소’, 2022년에는 방송인 황광희와 ‘호랑이’를 각각 공개했다.
추억의 ‘마시마로’와 손잡고 다시 한번 도약 기대
오비맥주는 계묘년을 맞아 추억의 캐릭터 ‘마시마로’와 손을 잡았다. 귀여운 토끼 모습의 마시마로는 2000년대 초 플래시 애니메이션으로 처음 선보였다. 당돌하고 솔직한 이미지로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오비맥주는 그런 마시마로를 끌어들여 밀맥주 ‘카스 화이트’의 ‘부드러울 수도 상쾌할 수도, 그냥 있는 그대로 즐기는 거야’라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겠다는 계획이다.
새해 첫날인 1월 1일에는 카스 공식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 2000년대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는 협업 티저 영상을 공개했다. 이후 ‘카스 화이트×마시마로’ 한정판 굿즈를 출시한 데 이어, 팝업스토어 이벤트 등 마시마로를 활용한 오프라인 프로모션을 순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토끼 모양 자수 놓은 천으로 위스키 라벨 만들어
신세계L&B는 계묘년 스페셜 에디션 ‘마쓰이 쿠라요시 퓨어몰트 래빗 레이블’을 주류유통채널 와인앤모어 매장과 이마트에서 판매한다.
이 위스키는 일본 돗토리현(鳥取県)의 마쓰이주조(松井酒造) 제품이다. 여러 증류소의 몰트 원액을 블렌딩해 만든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여러 아이템 가운데 ‘마쓰이 쿠라요시 퓨어몰트’를 토끼해 특별 에디션으로 선보였다.
쿠라요시(倉吉)는 돗토리현 중부의 도시다. 자연풍광과 깨끗한 물로 유명하며, 지명 어원은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게 마쓰이주조 측 설명이다. 에도시대(17~19세기) 때 사케 양조장인 오가와주조(小川酒造)로 시작한 마쓰이(松井) 가문은 1910년 마쓰이주조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현재는 카오루 마쓰이(松井 薫)가 가업을 잇고 있다.
레빗 레이블의 라벨은 종이가 아닌 천이다. 그 안에 자수(刺繡)로 하얀 토끼를 그려 넣었다. 알코올도수 43도, 용량은 700㎖다.
신세계L&B 관계자는 “최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위스키의 관심이 높아지는 추세여서 이번 스페셜 에디션을 선보이게 됐다”며 “돗토리현의 깨끗한 물을 담아낸 일본 위스키로 명성이 자자한 마쓰이 위스키와 함께 계묘년을 활기차게 시작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검은 토끼든 흰토끼든 폴짝 뛰는 모습처럼 올해는 도약하는 한 해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물론 가만히 앉아선 그 어떤 소득도 기대하기 어렵다. 글머리에 말했듯 폴짝 뛰기 전 나만의 계획 세 가지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더불어 토끼의 큰 귀처럼 그 어느 해보다 많이 듣는 계묘년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문화경제 김응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