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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풍류 - 漢詩에 담긴 해학과 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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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91호 방효균⁄ 2008.11.05 09:03:52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시(漢詩) 중에는 삶의 여유가 넉넉한 해학과 더불어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풍자가 번득이는 작품이 많아 조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한자(漢字)와 한글을 비빔밥처럼 버무려 해학과 풍자의 진수를 보여주는 한시 두 수를 소개한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재치 저 유명한 방랑시인 김삿갓이 늦가을 석양 무렵 저잣거리 초가에 들러 하룻밤 묵어 가기를 청하였다. 마음씨 좋은 주인 노파는 흔쾌히 허락하고 방 하나를 비워주었다. 삿갓이 행장을 풀며 방안을 둘러보니, 시렁 위에 강정·빈사과(한과의 한 가지)와 대추·복숭아가 손님을 반기듯 놓여 있고, 천장 한구석에는 거미줄이 은실처럼 늘어졌다. 아랫목에 놓인 질화로에서는 잿불내가 제법 구수하였다. 다리를 쉬며 앉아 밖을 보니, 초가 지붕 위로 하늘이 아득하게 저물어 가고, 울 밑에 선 시든 꽃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저만치 강가에는 정자 하나가 그림 같은데, 소나무 밑에는 술 취한 선비가 곯아떨어졌다. 국수 한 사발에 간장 반 종지를 곁들인 저녁상을 물리고 한가롭게 앉았자니, 연못가 모래밭에 국화 한 송이 피었는데, 가지가 휘어져 물 위에 드리운 정경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어느덧 둥근 달이 솟아 중천으로 옮겨 가매, 산그림자도 따라 움직인다. 사위가 적막하여 밖으로 나섰더니, “워리, 사냥개” 하고 부르는 소리가 허공에 흩어지고, 뒷간에서는 구린내가 풍겨 나왔다. 교교한 달빛 아래 시흥이 도도해진 김삿갓은 방으로 들어가 호롱불 아래 지필묵연(紙筆墨硯)을 꺼내 놓고 먹을 갈았다. 그리고는 붓에다 먹물을 듬뿍 찍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 내려간다. 天長去無執(천장거무집 : 하늘은 아득하여 잡을 수가 없고) 花老蝶不來(화로접불래 : 꽃이 늙으니 나비는 오지 않네.) 江亭貧士過(강정빈사과 : 강가의 정자에 가난한 선비 지니다가) 大醉伏松下(대취복송하 : 잔뜩 취하여 소나무 아래 엎드렸구나.) 菊秀寒沙發(국수한사발 : 국화 한 송이 찬 모래밭에 피었는데) 枝影半從池(지영반종지 : 가지를 반쯤 연못에 드리웠도다.) 月移山影改(월이산영개 : 달이 옮겨 가니 산그림자 고쳐지고) 通市求利來(통시구리래 : 저잣거리 사람들은 잇속 따라 왔다갔다….) 시의 내용인즉, 오늘 저녁 초가에 머물며 느낀 정경을 그림 그려내듯 읊은 것인데, 그 음(音)마저 삿갓이 본 풍경과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그 풍경이란 이러하다. 천장에 거미집이요(천장거무집), 화로에 잿불내라(화로접불래). 시렁 위엔 강정·빈사과에(강정빈사과), 대추·복숭아도 있네(대취복송하). 국수 한 사발(국수한사발), 지령(간장의 방언) 반 종지(지영반종지). 워리 사냥개는 어디 가고(월이산영개), 통시(뒷간의 방언)에선 구린내가 진동하누나(통시구리래). 과연 김삿갓이 아니고는 지을 수 없는 절묘한 시가 아닐 수 없다. ■선비들의 코를 납작하게 한 농부 젊은 농부가 낫 한 자루를 허리에 차고 어린 소의 코에 코뚜레를 하여 길을 가는데, 나무 그늘에 모여 앉아 시회(詩會)를 하며 술잔을 기울이던 선비 몇이서 농부를 불러 세웠다. “거기 가는 농부님네, 이리 와서 술이나 한 잔 하소.” 마침 목이 컬컬하던 농부는 선비들 쪽으로 가서 예를 차리고, 한 사발 그득 따라주는 술을 받아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켰다. “나으리들 덕분에 해갈을 했습니다요. 고맙습니다요.” 그렇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려는데, 선비 하나가 농부의 발길을 잡는다. “어허, 술을 받았으면 답례로 시라도 한 수 짓고 가야 예가 아니던가.” 눈치를 보니, 선비들은 무식한 농부라 업신여기고 놀려먹자는 속셈 같았다. 농부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는 박장대소(拍掌大笑)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쩔쩔맬 줄 알았던 젊은 농부는 뜻밖에도 정중하게 응대를 한다. “소인, 배운 게 없어 무식하기는 하오나, 나으리들께서 주신 술을 얻어 먹었으니, 마땅히 답례로 시 한 수를 지어 올리겠습니다.” 농부는 선비가 내주는 붓에다 먹물을 듬뿍 찍어 새하얀 종이에 능숙한 솜씨로 써내려간다. 犢鼻에 貫ㅇ하고 (독비에 관ㅇ하고 : 쇠코에 코뚜레를 뚫고) 腰下에 佩ㄱ이나 (요하에 패ㄱ이나 : 허리에 낫을 찼을망정) 歸家하면 修ㄹ하나니(귀가하면 수ㄹ하나니 : 집에 가면 스스로 수양하니) 不然이면 點ㄷ하리라.(불연이면 점ㄷ하리라 : 그렇지 않으면 망하리라.) 여기에서 ㅇ·ㄱ·ㄹ·ㄷ은 한글 자음으로서 ㅇ은 둥근 코뚜레를, ㄱ은 구부러진 낫을, ㄹ은 사람이 무릎 꿇은 모습과 함께 한자(漢子)의 몸 기(己)를 각각 상징한다. 또한, ㄷ은 그 앞의 점(點)과 결합(·+ㄷ)하여 한자의 망할 망(亡)을 나타낸다. “내 비록 허리에 낫을 차고 소를 모는 농부일망정,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글공부를 하며 자기수양에 힘쓰나니, 당신네 양반님들처럼 대낮부터 술판이나 벌이며 빈둥거리다가는 기필코 망하리라.” 농부의 시에는 이와 같은 준험한 꾸지람이 들어 있다. 다시 쇠코뚜레를 잡고 돌아서는 농부의 등 뒤에서 간담이 서늘해진 선비들이 식은땀을 흘렸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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