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 축제는 1976년부터 1988년까지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지휘를 했으나 1988년부터 게르기예프의 뛰어난 지도력에 힘입어 잘츠부르크에 당당히 도전하고 있다. 오케스트라 음악은 잘츠부르크가 우세이지만 발레와 러시아 오페라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압도적이다. 그러므로 발레와 러시아 음악을 좋아한다면 마린스키 극장과 백야의 별 페스티벌에 한 번쯤은 가봐야 할 것이다. 필자는 2006년 7월 초 국립발레단과 예술의전당 후원 회원들과 함께 백야의 별 페스티벌에서 발레(‘해적’‘백조의 호수’), 베르디의 오페라(‘나부코’‘돈 카를로’) 그리고 유리 바쉬메트가 이끄는 모스크바 앙상블의 ‘쇼스타코비치 갈라’ 공연을 찾았다. 마린스키 극장의 과거와 미래 1988년에는 게르기예프가 마린스키 극장 지휘자가 됐으며 매년 여름 마린스키 극장에서 열리는 백야의 별 페스티벌을 감독하고 있다. 2006년 5월 10일부터 7월 19일까지 열린 이 음악 축제에는 마린스키 극장에서만 82회의 발레, 오페라, 콘서트의 공연이 펼쳐졌다. 마린스키 발레단은 황제 발레단, 마린스키 발레단, 키로프 발레단이라는 이름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마린스키 극장에서는 발레뿐 아니라 오페라와 오케스트라의 음악도 공연된다. 2006년 마린스키 극장은 301명의 오케스트라 멤버, 120명의 코러스 멤버, 22명의 소프라노, 13명의 메조소프라노, 23명의 테너, 8명의 바리톤, 13명의 베이스, 260명의 무용수, 300명 이상의 기술자들을 고용하고 있으며 지휘자도 14명이나 됐다.
고전발레는 프랑스의 루이14세 때 꽃 피우기 시작했는데, 그는 자신이 무용을 직접 추는 것도 좋아했으며 발레학교를 설립하고 귀족들과 함께 무용을 즐겼다. 그 당시 미개국으로 취급받던 러시아는 피오트르 대제가 새로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기면서 서방 문명을 도입하기 시작했으며 1738년에 아나 여제(Empress Anna)가 겨울궁전의 2층에 세계 최초의 발레학교(황제 발레단)를 설립하고 프랑스인 랑데를 발레마스터로 채용하면서 러시아 발레는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후 예카테리나2세는 서방 문화를 도입하기 위해 계몽 정책을 채택하고 1783년에는 러시아 최초의 석조극장(볼쇼이)을 설립하고 서방국의 오페라와 발레를 발전시켰다. 1860년에는 알렉산더2세의 부인인 마린스키의 이름을 따서 마린스키 극장이 건립됐다. 이 극장은 러시아의 민족 작곡가 5인(글린카, 무소르그스키, 규이,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들의 음악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개관 기념으로 글린카의 오페라 ‘황제의 일생’이 공연됐으며, 마린스키 극장은 러시아 오페라와 발레의 메카가 됐다. 그 후 스웨덴 출신의 요한손과 이탈리아의 무용수 3명(체케티 등)의 등장은 새로운 활력소가 됐다. 뒤이어 러시아 황실발레학교 출신인 안나 파블로바, 니진스키 등 많은 유명 무용가와 안무가가 등장했다. 특히 포킨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무용학교에서 공부한 마린스키 극장의 뛰어난 무용수로 세계적인 안무가가 됐으며, 그가 제작한 발레는 지금도 공연되고 있다. 마린스키 극장 출신의 아그리피나 바가노바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레 교사이며 1934년에 출판된 그의 고전 발레에 관한 책은 전 세계적으로 발레 교육의 표준 교과서가 됐다. 마린스키 극장의 뛰어난 발레리나였던 그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1917년에 무대 생활을 마치고 발레 교육에 전념하여 황실 발레학교를 이어받았다. 마린스키 발레에 부속된 무용학교를 살리면서 훗날 루돌프 누레예프 같은 뛰어난 무용가들을 양성했으며 이 학교의 졸업생들은 마린스키 극장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은 예술계에도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 그리하여 마린스키 극장은 키로프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키로프는 혁명가이면서 스탈린의 동지이자 경쟁자이기도 했다. 그는 레닌그라드의 공산당 서기가 됐으며, 그 당시 공산당 내부에서는 스탈린보다 인기가 더 좋았다고 한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스탈린은 키로프를 가까이에서 감시하기 위해 모스크바의 공산당 서기로 올 것을 권했다. 그러나 키로프는 이를 거절했고 얼마 후인 1934년 암살됐다. 그 배후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스탈린이 지시로 암살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후 스탈린은 대대적인 숙청으로 경쟁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마린스키 극장을 키로프로 개명했다. 이처럼 황실 발레단으로 출발한 마린스키 발레단은 키로프발레단이 됐다가 구소련이 붕괴와 더불어 다시 마린스키라는 이름을 되찾게 됐다. 그러나 전통을 중요시하는 러시아인들은 오늘날 이 세 가지 이름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 음악의 황제가 된 발레리 게르기예프 1991년 구소련의 붕괴로 마린스키는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았다. 1991년에 구소련 정부가 무너지자 러시아 경제는 파산 위기를 맞게 됐고 러시아 음악인들은 생계가 어려워지자 서방국가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소련 연방은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예술과 체육에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소련 정부가 무너지자 러시아의 예술인들은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되고 마린스키 극장도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이때 한 젊은 지휘자가 나타나 마린스키 극장을 구했을 뿐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는 마린스키 발레, 오페라, 오케스트라를 회생시켰다. 그 지휘자가 바로 마린스키와 백야의 별 페스티벌을 이끌어가는 발레리 게르기예프다. 그는 코카사스 지방의 소수민족인 오셋시아(Ossetia)계의 러시아인으로 레닌그라드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공부하고, 1978년에 키로프오페라의 유리 테미르카노프의 부 지휘자, 1988년에는 수석 지위자, 그리고 1996년에는 서른세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마린스키 극장의 총감독이 됐다. 백야의 별 페스티벌은 1992년에 시작됐지만 게르기예프가 1996년부터 총 감독을 맡으면서 엄청난 재능과 에너지로 백야의 별 페스티벌과 마린스키의 오페라를 세계의 정상으로 끌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과거에 마린스키 극장은 주로 러시아 오페라를 제작했지만 지금은 이탈리아뿐 아니라 바그너에서 모차르트까지 그 레퍼토리를 넓히고 있다. 게르기예프는 마린스키 오케스트라뿐 아니라 로테르담 필하모닉의 상임지위자와 메트로폴리탄의 선임 객원지휘자를 겸하고 있으며, 2007년부터는 런던 심포니의 상임지휘자가 됐다. 또한 게르기예프는 지휘봉을 쓰지 않고 열 손가락으로 지휘하기로 유명하며 그가 지휘하는 모습은 신들린 무당의 모습을 연상케 할 정도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베를린 필의 지휘자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 축제로 키웠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 게르기예프는 마린스키의 백야의 별 페스티벌을 강력한 경쟁자로 내세우고 있으며 잘츠부르크에 버금가는 음악 축제가 되고 있다. 2007년에는 마린스키 극장이 새로운 콘서트홀의 문을 열어 세계 최고의 음향을 자랑하는 공연장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마린스키 심포니 오케스트라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성장하고 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 축제가 잘츠부르크의 하기 축제 버금가는 음악 축제가 되고 있다. 게르기예프의 강력한 지도 아래 마린스키 극장은 과거 러시아 문화 강국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패전 후 음악적으로 카라얀이 독일이 자존심을 살린 사람이라면, 게르기예프는 러시아 문화의 자존심을 살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카라얀이 유럽 음악계의 황제가 된 것처럼 게르기예프는 러시아 음악의 황제로 발돋움 하고 있다. - 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