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윤기 변호사의 법률이야기] 안락사 논의의 진보…이제 ‘웰 다잉’ 시대로
(CNB저널 = 고윤기 로펌고우 변호사) “오랜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병수발을 드는 가족들의 괴로움을 일컫는 말입니다. 물론 사람이 오랜 기간 아프면, 가장 괴로운 사람은 환자 본인입니다. 무력해지는 자신을 보는 것도, 힘들어하는 가족들을 보는 것도 괴롭습니다. 인간답게 살 권리도 중요하지만, 인간답게 죽을 권리도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웰 다잉(well-dying)이라는 신조어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살아온 날을 아름답게 정리하는, 평안한 삶의 마무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웰 다잉의 의미는 단순히 평안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안락사, 혹은 연명치료 중단 결정과 맞물려 있는 개념입니다.
안락사의 정의와 종류
먼저 안락사가 무엇일까요? 단지 편하게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법률적으로는 적극적 안락사, 소극적 안락사, 간접적 안락사로 구분합니다.
첫째, 적극적 안락사란 불치의 병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의 고통제거를 위해 환자의 생명을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둘째, 간접적 안락사란 생명을 단축시킬 염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완화 목적의 처치를 한 결과,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예상된 부작용으로 인해 환자가 사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환자의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몰핀을 계속 증량하여 사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환자가 사망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셋째, 소극적 안락사란 죽음에 직면한 환자에 대한 치료를 중지하거나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함으로써 환자가 사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말합니다.
적극적 안락사는 어떻게 보면 살인 행위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에 논외로 하고, 간접적 안락사도 적절한 치료 방법으로 진행한 것이라면 적합하게 따른 경우 처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로 논의하는 것은 소극적 안락사입니다.
종합병원을 무대로 한 인기 미국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를 보면, 종종 환자가 ‘연명치료 중단서’에 서명을 했기 때문에 의료진이 더 이상 환자를 살리기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없는 상황이 나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상황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국과 우리나라가 다른 의료 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생기는 일입니다.
우리나라 안락사 논의의 전개
우리나라에서 안락사를 인정해야 할 것인가의 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97년의 보라매병원 사건입니다. 당시 보라매병원에서 뇌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로 생명을 유지하던 환자를 부인의 요구로 퇴원시켰고, 환자는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의료진은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국민들이 안락사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게 된, 상당히 의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2009년 세브란스 병원에서 발생한 ‘김 할머니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김 모 할머니의 가족들이 연명치료를 중단해달라며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건입니다. 결국,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해서 연명치료의 중단을 결정합니다.
그 이후 연명치료 중단의 문제는 종교, 의료, 법조계 등에서 논의되어 왔지만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다 2015년에 이르러서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었습니다. 이 법은 2016년 2월에 공포되었으며 2017년 8월 시행 예정입니다.
▲시애틀의 그레이스 종합병원을 무대로 한 미국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Grey’s Anatomy)’는 생명에 관한 다양한 문제를 보여준다. 안락사에 관한 고민 역시 여러 차례 다뤘다. 사진은 그레이스 병원의 의사이자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인 데릭(패트릭 뎀시, 왼쪽)과 메러디스(엘런 폼페오). 사진 = 방송 화면 캡처
이 법은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방법과 절차를 규정했습니다. 일단 연명의료 중단의 대상은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로서 회생의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지 아니하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환자가 임종 과정에 있는지의 여부는 담당 의사와 해당 분야의 전문의가 의학적으로 판단합니다. 중단할 수 있는 연명의료의 유형은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으로 한정됩니다. 그리고 이 연명의료들이 치료효과 없이 임종 과정의 기간만을 연장하는 경우여야 합니다. 치료 효과가 없는, 즉 더 이상 환자가 회복될 수 없는 상태에서 행하는 의료 행위를 중지하는 것입니다.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법 규정
법은 다음 세 가지 경우에 환자의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고 규정했습니다.
첫째, 환자가 의식이 있어 환자 자신이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명확한 의사표시를 할 수 있는 경우에는 환자가 담당의사와 함께 ‘연명의료계획서’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 경우
둘째, 환자가 의식이 없어 환자가 자신의 의사를 직접 표시할 수 없는 경우에는 사전의료의향서에서 연명치료 중단 의사를 담당 의사와 해당 분야의 전문의 1명이 확인하거나, 환자의 가족 2명 이상이 환자의 연명의료 중단 등 결정에 관한 의사로 보기에 충분한 기간 동안 일관하여 진술(이 경우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 전문의 1명의 확인 필요)한 경우
셋째, 연명의료에 대해 어떤 의사를 가졌는지 추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미성년자의 경우 친권자가 대리하여 중단 여부를 결정할 수 있고, 성인의 경우 환자 가족 전원의 합의를 거쳐 담당 의사와 해당 분야의 전문의 1명의 확인을 거친 경우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 진정한 웰 다잉의 시대를 열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입니다. 그러나 기존의 입장에서 크게 진보한 것은 분명합니다.
(정리 = 윤지원 기자)
고윤기 로펌고우 변호사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