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바이럴 광고가 LG생활건강 마케팅팀을 저격했다. 해당 광고 영상은 1분 30초짜리 페이스북 영상이다. 명색이 광고지만 제품 이야기는 마지막 20초밖에 안 나온다. 나머지 앞부분 1분 10초는 토요일 밤에 급한 광고 제작을 의뢰받아 놀 수 없게 된 광고 제작자가 분노 때문에 일부러 광고주 욕보이는 엉터리 결과물을 납품한다는 내용이다. 제작자 스스로도 “정신 차리고보니 이거 거의 고소감”이라며 후환을 두려워했지만, 정작 이 광고는 업로드 후 2주 만에 페이스북 87만 회, 유튜브 128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건 개요 및 영상 줄거리
사건은 한 페이스북 사용자가 지난 3월 6일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직접 만든 영상 한 편을 게시하면서 시작됐다. 해당 영상은 LG생활건강의 세탁세제 ‘피지(Fiji)’ 브랜드의 ‘파워 시트’ 제품 광고를 위해 제작된 영상이다. ‘본격, LG 빡치게(화나게) 하는 노래’라는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불토(불타는 토요일)에 일 시킨 대가다’라는 부제도 붙었다. 누군가를 화나게 만드는 노래라는 것만으로도 호기심이 생기기에 충분한데 상대가 무려 대기업인 LG라니 사연이 더욱 궁금해진다.
재생 버튼을 클릭하면 조악한 퀄리티의 애니메이션과 조악한 퀄리티의 노래가 시작된다. 노래라고 보기에는 랩 같고, 랩이라고 보기에는 노래 같다. 어쩌면 굿을 하는 소리 같기도 한 기묘한 노래인데, 빠른 템포의 반주에 숨도 거의 쉬지 않고 전달하는 가사의 내용은 제목 이상으로 파격적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이 영상의 제작자는 3월 3일 토요일 밤에 친구와 춤을 추러 클럽에 가고 있는 중이었다(춤을 춘다는 말로 점잖게 바꿨지만 원본 영상에서는 '궁둥이 좀 흔들어보려고'다). 그런데 자정이 가까운 시간, '매니져 오빠'로부터 일정이 빠듯한 광고 제작을 급하게 의뢰하는 문자메시지를 받고는 클럽을 포기하고 혼자 귀가해 영상 제작에 착수했다.
제작자는 돈을 벌게 된 건 내심 반가우나 '불토'에 못 놀고 일해야 하는 처지에 짜증이 났고, LG생활건강 마케팅부가 매니저를 통해 일을 의뢰하면서 제시한 조건의 허점을 이용해 골탕을 먹이기로 마음먹었다. 메시지에 "컨펌도 필요 없고 업로드 일정이 제일 중요하다"고 되어 있는 것에 대해 제작자는 "적어도 컨펌만은 한다고 했어야 했다"라며 본격적으로 광고주 약 올리기를 시작한다.
자신의 불토를 빼앗았으니 광고주는 좀 더 초조해져야 한다며 노래가 끝나 가는데도 광고를 시작하지 않는다. 이어 자신을 건드리면 누구든 큰일 난다는 경고까지 하고 나서야 선심 쓰듯 광고를 시작한다. 총 1분 32초짜리 영상에서 광고 부분은 23초 분량에 불과하다. 그나마 광고 부분에서는 해당 제품의 장점을 정확히 짚어주며 감탄의 표현도 과장되게 담아, 병 주고 약 주는 식으로 마무리한다.
내용만 파격적이고 노골적인 것이 아니다. 우선, 노래 가사로 표현된 언어에는 ‘X발’이나 ‘ㅈ되는 거야’ 등 거친 비속어가 난무한다. 자신을 광고주에게 아부해야 하는 하청업자라고 표현하기 위해 광고주 앞에서 무릎으로 기거나 광고주의 발바닥을 핥는 모습을 묘사한 것도 불편할 수 있다. 제작자 자신을 나타내는 주인공 캐릭터는 여성인데, 가슴이 마치 자동차 와이퍼처럼 움직이거나 두 손을 대신해 제품을 들기도 하는 기괴한 묘사가 가득하다.
뜨거운 반응…광고주 칭찬받아 마땅
이 영상은 공개 일주일 만에 제작자의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만 수십만 번 조회되며 화제가 됐다. 많은 언론매체가 이 광고의 바이럴 현상에 대해 관심을 두고 보도했으며, 대부분 비속어나 낮은 퀄리티를 문제 삼기보다 B급 콘텐츠를 활용한 마케팅이 대중에게 호응을 얻는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광고는 이후에도 유튜브, 트위터 등 다른 SNS 채널로도 끊임없이 퍼져 나갔다. 다른 UCC 제작자의 창작물에도 영향을 끼쳤다. 전자기타 연주 영상으로 유명한 유튜버는 이 광고의 음악을 헤비메탈 스타일로 연주하는 영상을, 드럼을 치는 유튜버는 드럼 반주 영상을 만들어 올렸다. 래퍼가 부른 랩 버전, 피아니스트가 연주한 피아노 버전도 나왔다.
3주 가까이 지난 3월 23일 현재까지 이 광고는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87만 회 조회됐고, 6500여 개의 댓글이 달렸으며, 4050회나 공유됐다. 다른 사용자가 유튜브에 올린 게시물은 130만 회 가까이 조회됐고, 2만 개의 ‘좋아요’, 1700개 이상의 댓글을 기록하고 있다. 타 창작자들이 변주한 영상의 조회수만 도합 22만 회가 넘는다.
광고를 본 사람들의 댓글은 적게 잡아도 90% 이상이 호의적이다. 단순히 재미있어하기보다 ‘광고주 디스 광고’라는 역발상 콘셉트, B급 취향에 딱 맞는 의도적인 조악함 등 창의적인 면을 구체적으로 칭찬하는 댓글이 많다. 갑을관계를 역전시킨 제작자의 분노와 패기에 공감하는 의견도 다수다. 신나는 음악의 중독성 때문에 매일같이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온다는 댓글이 꾸준히 늘고 있다.
광고로 뒤통수 맞고 ‘빡쳐’ 있어야 할 광고주를 칭찬하는 댓글도 많이 눈에 띈다. 컨펌 유무의 진위와 무관하게 대기업 마케팅팀이 이런 과감한 광고에 도전했다는 점, 또한 자신들을 디스하는 광고가 지금도 조회수가 올라가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는 점이 호평받고 있다. “역시 광고문화의 발전은 광고주의 열린 마음에 달려 있다”, “이걸 보고 다른 광고주들도 좀 더 도전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등, 파격과 배은망덕이 뛰어난 창의력의 결과임을 인정한 LG생건 마케팅팀의 안목에 대한 호평도 이어지고 있다.
B급 정서와 파격은 LG생건이 의도한 바
이 광고는 LG생활건강이 2016년 5월에 출시한 세탁 세제 브랜드 ‘피지(Fiji)’의 ‘파워 시트’ 제품을 소개하는 광고다. 피지는 섬유 손상의 중요한 원인이 되는 피지(皮脂)까지 제거해준다면서 강력한 프리미엄 세제를 표방하는 제품이다. 브랜드 작명 단계에 이미 B급 정서에 가까운 언어유희가 포함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다.
LG생건 관계자는 “피지는 아직 출시 2년이 채 안 돼서 다른 세탁세제 브랜드에 비해 시장에서 브랜드 인지도가 낮다”고 밝혔다. 국내 세탁세제 시장에서는 LG생활건강의 테크, 피죤의 액츠, 애경의 스파크와 리큐, CJ제일제당의 비트, 헨켈의 퍼실 등 오랜 시간 사랑받아 온 브랜드가 높은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피지는 갈 길이 멀다.
LG생건 마케팅팀은 피지 브랜드의 시트(종이) 타입 세제인 '파워 시트'를 1인 가구가 많이 사용한다는 점에 착안, 1인 가구의 다수를 구성하는 20~30대 젊은 소비자를 타깃으로 이번 광고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위해 LG생건 마케팅팀은 ▲젊은 세대가 B급 감성에 호의적으로 반응한다는 점 ▲최근 광고비 규모에서 온라인 광고가 방송 광고를 넘어섰다는 점 ▲생활용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블로거나 유튜버, SNS 스타 같은 ‘인플루언서’의 콘텐츠를 신뢰하는 경향이 크다는 점 등을 고려했고, 그 결과 B급 감성의 광고 영상 제작 경험이 많고, 팔로워 및 조회수가 많은 인플루언서를 찾아 광고 제작을 의뢰했다.
문제의 영상을 제작한 사람은 ‘반도의흔한애견샵알바생’이라는 독특한 대화명을 사용하는 허지혜 씨다. 허 씨는 자신이 직접 기획·출연·제작한 웃긴 영상들로 SNS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UCC(User Created Contents: 사용자 제작 콘텐츠) 크리에이터다. 3월 23일 현재 페이스북 팔로워는 70만 명이 넘고, 2014년부터 제작해서 업로드한 동영상은 250편이 넘는다.
허 씨가 만든 영상은 인기가 많다. 어지간하면 조회수 40만 회를 넘기고, 100만 회를 넘긴 영상도 수십 편, 400만 회를 넘긴 영상도 두 편이나 있다. 애견샵에서 알바를 하던 시절 혼자서 셀프카메라로 만든 웃긴 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시작하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마니아 팬들이 생기면서 tvN ‘SNL코리아’나 KBS2 TV의 ‘뮤직뱅크’ 등 TV 프로그램에도 종종 출연한 유명인이다.
지금은 UCC 제작 및 관련 인플루언서들의 매니지먼트 사업을 하는 '스타E&M'에 소속되어 화장품이나 스마트폰 앱 같은 중소기업 상품의 온라인용 광고 영상을 제작하는 아티스트로 활약 중이다. 더 웃긴 영상을 만들기 위해 애니메이션이나 사운드 기술도 직접 익혔다. 블로거나 유튜버 등이 주도하는 ‘인플루언서 마케팅’은 주로 상품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리뷰 형식의 광고가 대다수인데, 허 씨는 엉뚱한 B급 상상력으로 무장한 웃긴 영상으로 일관하기 때문에 광고주를 당황하게 만들 때가 많다.
LG가 빡칠 리가?에 "이런 결과는 예상했다"
LG생건 마케팅팀은 이 제작자의 경력 및 작품 경향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예상 결과물에 대해서도 충분히 신뢰하고 있었다. 광고 내에서 “컨펌이 필요 없다”고 한 것은 절반만 사실인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LG생건 관계자는 “시나리오와 제작은 100% 크리에이터가 한 것”이라면서도 브랜드 고유성이 직결된 문제임을 언급하며 “컨펌 절차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광고계 관계자는 “의뢰할 때 정한 가이드라인을 넘었는지만을 확인하는 수준의 컨펌이 이뤄졌을 것”이라면서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점을 크리에이터의 장점으로 판단하고 애초에 가이드라인을 느슨하게 정하고, 매우 많은 것을 허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해당 문자 내용은 완성본의 퀄리티나 디테일을 트집 잡지 않겠으니 자유롭게 만들어도 좋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번 LG생건 도발 광고도 마케팅팀이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는 범위의 결과물이었다. 허 씨가 이미 이것과 구성과 내용이 거의 동일한 광고를 만든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는 설 연휴에 일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 음악과 캐릭터가 똑같고, 화가 난 사연과 불만을 1분 이상 늘어놓다가 마지막 20여 초 동안만 집중적으로 광고를 해주는 것도 똑같다.
LG생건 관계자에 따르면 회사 측은 이번 광고에 매우 만족하는 분위기다. 이 관계자는 "광고 이후 피지의 누적 매출 데이터는 아직 집계되기 전이지만 내부적으로 반응이 괜찮다"며, "피지는 아직 브랜드 인지도가 높지 않은데, 이번 광고의 댓글이나 SNS 반응을 보면서 브랜드를 널리 알리는 효과가 컸다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광고가 트렌드면 제품도 트렌드
1분 32초 영상에서 피지 얘기는 뒷부분 23초밖에 안 했는데 브랜드 인지도가 높아졌다고? 댓글 반응을 보면 이 또한 사실이다. 제품과는 무관한 다른 얘기로 시청자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는 콘셉트의 광고인데, 정작 수천 개의 댓글 사이에 피지를 언급하는 댓글이 많이 눈에 띈다. 기자는 그동안 수많은 광고의 댓글을 봤지만, 브랜드를 자발적으로 거론하는 댓글이 이보다 많은 광고는 없었다.
“그 와중에 제품 흥미롭다”, “안 그래도 시트형 세제 살 예정이었는데 이거 사러 가야겠다”, “피지 안 써볼 수가 없는 광고”, “이거 본 날 퍼셀 사려다가 저걸로 샀다. 딱 저걸로” 등 광고의 효과는 댓글 반응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또 “이 광고 아니었으면 이런 제품 나온 줄도 몰랐을 듯”, “역대급 웃기고 최고다. 세제 한 번 써봐야지”, “일단 이런 제품이 있다는 걸 알렸다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라며 이번 광고의 효과를 높게 평가하는 댓글도 많다.
광고계 관계자는 “LG생건의 ‘갑질’을 고발하는 것 같아 통쾌한 마음도 들겠지만, 이 스토리에서 피해자는 분명히 LG생건”이라며 “마지막에야 드디어 등장하는 광고는 제작자가 마케팅팀을 불쌍히 여겨 마지못해 넣어준다는 뉘앙스라서, 과하게 감탄하는 민망한 내용인데도 시청자가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분석했다.
재미있는 가사의 신나는 음악이 만드는 중독성 때문에 이 광고를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 듣다가 피지에 세뇌됐다는 사람들도 많다. 한 시청자는 “마치 마법의 주문 같다”면서 “반나절 동안 반복재생으로 듣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모르게 이마트 가서 피지 파워시트 한 상자 사 와서 빨래 돌리고 있더라”고 고백했다.
“12번째 들었다. 피지 살 테니까 이 영상 좀 내려줘요. 일상생활 안 돼요. 부탁드려요”라고 호소한 댓글도 있다. 몇 시간마다 “또 들어와서 보고 있다”는 댓글을 반복적으로 남기던 한 시청자는 중독성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듯 “결국 샀네. 이제 그만 들어와야지”라고 밝혔으나, 몇 시간 뒤 “또 들어와서 보고 있다”는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광고계 관계자는 이런 댓글 반응을 분석하면서 “수년 전 ‘허니버터칩’이 다른 어떤 과자보다도 맛있어서가 아니라 ‘품절사태’라는 기이한 트렌드에 동참하고 싶은 심리 때문에 인기가 더 높아졌던 것과 비슷하다”며 “제품의 품질에 대한 신뢰가 올라간 것이 아니라 피지 브랜드를 자기 취향을 저격하는 트렌드의 일부로 여기게 만든 결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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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알바천국 편: 기업 광고가 이렇게 정치적일 수 있다니
⑨ 하이트진로·오비맥주 편: 광고로 띄운 저가 전략, 알고보니 궁여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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